우리나라 첫 세계인 혜초의 길 따라
프롤로그
지난주에 도서관에서 빌린 책 가운데 하나가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다. 신라인 혜초가 8세기 초에 인도 5국(五國) 부근의 여러 나라를 순례하고 그 행적을 적은 여행기를 문명교류사의 세계적 권위자로 지난 2월 24일 별세한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이 역주(譯註; 번역과 주석)한 책이다.
정 소장은 왕오천축국전에 나오는 7개 외국어를 번역해 책으로 펴냈고, 실크로드를 9차례나 답사하고 실크로드학 등 10여 권의 번역서와 저서를 내기도 했다.
1934년 중국 연변 출생의 정수일 교수는 베이징대 졸업, 중국 국비 카이로대 유학생, 모로코 주재 중국 대사관 근무, 1963년 북한행 및 평양외국어대학 교수 역임, 1984년 '무함마드 깐수'라는 이름의 아랍계 필리핀인으로 신분 위장 한국 입국, 1990년 '신라와 아랍·이슬람제국 관계사에 대한 연구'로 단국대 박사학위 취득, 1996년 7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검거, 2000년 광복절 특사로 출소 등 특이한 인생 역정을 가졌다.
저자는 2004년 출간한 이 책에서 "남의 땅에 기념비 세우는 데나 만족하지 말고, 이 땅의 아늑한 서산 기슭에 사적비 하나라도 세우는 것이 이 시대를 사는 후손들의 응분의 도리가 아니겠는가"라며 '우리나라의 첫 세계인'이자 위대한 여행가인 혜초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과 홀대를 질책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저자가 "우리 역사 속에서 밖으로 나가는 통로였다"라고 했던 평택의 평택호 부근에 2009년 5월 28일 '혜초 기념비'가 세워졌다.
둔황 막고굴의 고대 유물
지금으로부터 1300여 년 전인 8세기 초반에 혜초가 쓴 <왕오천축국전>은 13C 후반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14C 초반 오도릭의 <동유기>, 14C 중반 <이븐 바투타 여행기>와 함께 세계 4대 여행기로도 손꼽힌다. 작성한 지 1200여 년 뒤에야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보게 된 혜초의 여행기와 그의 행적을 추적해 보았다.
1900년 음력 5월 26일, 둔황 막고굴의 도사(道士) 왕원록(王圓簶)은 제16동을 수리하다가 북쪽 벽면 뒤에 숨겨진 작은 굴에서 수많은 불경과 경전 사본들을 발견한다. '장경동(藏经洞)'으로 명명된 막고굴 제17 굴은 만당(晚唐) 때인 851-862년에 둔황 고승 홍변(洪辩, ?-862) 법사의 영당(影堂)으로 건설된 것으로, 그 안에서 4~11C에 걸친 고대 각종 문헌 자료와 문화재 예술품 약 5만여 점이 발견되었다.
출토된 문헌은 천문, 지리, 정치, 경제, 군사, 문학, 사지, 의약, 과학기술, 민족, 종교, 예술, 생활상 등 다양한 분야를 망라하고, 한자를 비롯해서 중앙아시아와 소수 민족 문자로 된 문서들도 포함되어 있다.
누구도 이 고대 유물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했고 청(淸) 정부의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차례로 외국의 '탐험대'에 의해 세계 각지로 흩어지게 된다. 1905~1915년 중 영국인 스타인, 프랑스인 펠리오, 일본인 키요미즈초오(桔瑞超), 요시카와 고이치로(吉川小一郎), 러시아인 오덴부르크 등이 잇따라 왕원록으로부터 약 4만 점의 문서와 경전 등 장경동 유물을 사기 구매해서 해외로 유출한다.
1906년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P. Peiliot, 1878~1945)는 우연히 우루무치에서 유배된 관리로부터 둔황 막고굴의 장경동에 대한 얘기를 듣는다. 그는 1908년 2월 일행 세 명을 이끌고 둔황 막고굴에 도착하여 장경동의 유물들을 세밀히 탐색했다. 5월 12일 밤, 펠리오는 왕원록에게 은자 500냥을 주고 장경동에 있는 6600여 권의 고문서, 당대(唐代) 회화, 번당(幡幢), 직물, 목제품, 목활자, 법기(法器) 등을 넘겨받아 파리로 보냈다.
한편, 일본 교토의 정토종 서본원사(西本願寺)의 22대 문주(門主)이자 탐험가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 1876- 1948)는 1차 탐험(1902-1904)을 시작으로 1914년까지 총 3차례 중앙아시아 원정 탐험을 하고, 그 지역 유물을 수집 약탈 반출했다. 그가 보관하고 있던 유물 가운데 360여 건 1500여 점이 1916년 당시 조선총독이던 데라우치(寺內正穀, 1852-1919)에게 기증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막고굴 장경동 유물도 포함되어 있다.
약탈되어 세계 각지로 흩어진 장경동 유물은 동서양 학자들이 다양한 각도의 연구를 촉발하여, 1930년대에 '돈황학(敦煌学)'이라는 독자적인 학문을 탄생시킨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중국 국학대사(国学大师) 지시엔린(季羡林, 1911-2009)은 "둔황과 신장 지역은 중국, 인도, 그리스, 이슬람 네 가지 문화 체계가 합류하는 유일무이한 곳"이라고 장경동 유물의 가치와 의미를 갈파하기도 했다.
펠리오가 프랑스로 반출한 고서 가운데 하나가 혜초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다. 이 여행기는 세로 28.5cm, 가로 358cm로 총 227행 5893자가 남아 있는 두루마리에 적힌 필사본으로, 발견 당시 앞뒤가 떨어져 나간 상태로 책명도 저자명도 알 수 없었다. 발견된 지 7년 후인 1915년 일본 학자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郎)에 의해 저자인 혜초가 신라 출신의 승려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혜초의 길
혜초(慧超, 704-787)는 신라인으로 16세 때인 선덕왕 18년(719년) 당나라로 들어갔다. 당시 성행하던 신라인들의 입당구법(入唐求法)이나 유학의 물결을 타고 이루어졌을 것이다. 진흥왕 때인 549년 양(梁) 나라에서 돌아온 신라승 각덕(覺德)을 필두로 자장(慈藏, 590-658), 원측(圓測, 612~696), 순경(順憬), 혜통(惠通), 의상(義相, 625-702), 김교각(金喬覺, 697-794), 명랑(明朗), 도증(道證), 명효(明曉), 승전(勝詮) 등 수많은 구법승들이 당나라를 찾았다.
"신라 사람들은 승려이건 유자(儒者)이건 간에 반드시 서쪽으로 대양을 건너서 몇 겹의 통역을 거쳐 말을 통하면서 공부하러 간다."_ 최치원,『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
혜초는 719년 당나라 광주(廣州)에 도착하여, 남천축 출신의 밀교승 금강지(金剛智; Vajrabodhi, 669-741)를 만나 그를 사사(師事)했다. 금강지의 권유로 723년에 광주를 떠나 스승이 건너온 바닷길을 거꾸로 잡아 폐사리국( 현재 인도 동북부 바이샬리)에 도착하여, 갠지스 강을 따라 바라나시∙카슈미르∙페르시아 지방 등 인도와 아랍 일대를 순유하고, 727년 11월 상순에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 소재지인 구자(龜慈; 현 신강 위구르 자치구의 Kucha)를 거쳐 장안으로 돌아왔다. 혜초가 이동한 경로는 육로로만 1만 km가 넘고 기간은 장장 4년에 걸친 멀고 긴 여정이었다. 혜초는 죽음을 무릅쓰고 고행을 자초하면서 다른 세계로 걸어 들어가서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한 이문명(異文明)에 대한 기록을 남긴 위대한 여행자요 순례자였다.
달 밝은 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
뜬구름은 너울너울 돌아가네
그 편에 감히 편지 한 장 부쳐 보지만
바람이 거세어 화답이 안 들리는구나
내 나라는 하늘가 북쪽에 있고
남의 나라는 땅끝 서쪽에 있네
일남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
누가 소식 전하러 계림으로 날아가리
月夜瞻鄉路 浮雲颯颯歸
緘書忝去便 風急不聽迴
我國天岸北 他邦地角西
日南無有鴈 誰爲向林飛
_혜초가 천축국 기행 중 지은 시(詩)
이 시대의 여행은 혜초의 인도 기행처럼 목숨을 걸거나 고행을 자초하지 않아도 된다. 시간과 금전적 여유가 있으면 누구든 하루쯤이면 원하는 세계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세상이다.
'Excellence in Flight' 기치를 내걸고 있는 국내 대표 항공사의 10여 년 전 '어디까지 가봤니?' 광고 시리즈가 생각난다. '어디선가 들려온 먼 북소리에 이끌려' 3년 동안 유럽을 여행했다는 <먼 북소리>의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내 마음속 북소리는 언제쯤 다시 둥 둥 둥 울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