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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물처럼 번천 라이딩

페달 위 느림의 미학

by 꿈꾸는 시시포스


라이딩을 하러 자전거를 싣고 경안천변 퇴촌면 정지리로 차를 몰았다. 광주시는 난개발의 대명사로 알려진 도시 중 하나이지만,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된 팔당호 부근 경안천 하류 지역은 가까스로 개발의 난장(亂場)을 면했다.

그래서인지 경안천습지생태공원, 팔당물안개공원 등 경안천과 남한강변을 찾는 이들이 적지 않고 숨겨진 라이딩 명소이기도 하다.


아침 안개를 몸에 잔뜩 휘두른 무갑산을 바라보며 경안천 위에 걸린 지월교를 건너, 정자 2리 마을회관 부근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서하리를 비롯해서 경안천 인접 부근 여러 마을에는 토마토 생산 농가가 많아서, 도로변에 토마토 상징 조형물과 토마소 판매소가 많이 눈에 띈다.


서하리 부근에서 경안천으로 흘러드는 번천을 따라, 그 상류로 거슬러 올라 되돌아오는 라이딩 코스를 마음속에 그리며, 경안천 위에 놓인 인도교 위로 페달을 밟았다.

번천(樊川)은 광주시 남한산성면 검복리에서 발원하여 초월읍 서하리 경안천으로 합류하는 길이 12.64km의 짤막한 지방하천이다. 마을 앞 넓은 농지에 온통 비닐하우스가 들어서 있는 서하리 경안천변 뚝길을 지나 번천으로 접어들었다.

정지리 앞 경안천과 인도교
경안천으로 흘러드는 번천의 합류 지점

번천을 따라 그 좌우 산줄기 사이에 상번천 여러 마을이 자리한다. 굴다리 아래를 지나 제1,2 중부고속도로 사이에 자리한 상번천 3리로 들어서니, 마을회관 옆에 '이경함(李景涵) 공적비'가 눈에 들어온다. 광주 출신인 경함 이발( 李潑, 1544-1589)은 부제학과 대사간을 역임한 관료였다.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이념으로 삼아 사론(士論)을 주도하고 왕도정치를 제창한 그는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집권한 서인에 의해 1589년에 고문을 받고 죽임을 당했다.


마을마다 농부들은 밭갈이나 과수 가지치기 등으로 일손이 분주해 보인다. 중부고속도로 고가 아래 내곡천변 마늘밭 옆을 지날 때는 코끝이 매콤해지며 마늘 냄새가 확 풍겨왔다. 상번천삼거리부터는 차도와 자전거도로가 구분이 없고 지나는 차량도 제법 많다. 당초 엄미천이 번천과 합류하는 광지원까지 달려가보려던 계획을 바꾸어 번천교에서 핸들을 돌렸다.


고속도로 톨게이트 입구인 상번천 1리의 마을회관 앞을 지나니, 번천초교가 눈에 들어온다. 칠사산 북변 산자락에 자리한 학교는 일요일이라 교문이 닫힌 채 너른 운동장엔 고요만이 머물고 있다. 학교 정보를 찾아보니, 전교생이 65명으로 학급당 6.5명, 교원 1인당 8.1명이다. 이는 전국 초교 평균 학급당 학생수 20명, 교원 1인당 14.8명에 훨씬 못 미치는 수치다.

전국 초등학교와 초등학생 수는 2020년 6120개 269.4만 명, 2024년 6183개, 249.5만 명으로, 출산율 저하로 학생 수는 약 20만 명이 줄어든 반면, 학교 수는 오히려 63개가 늘어났는데, 이는 새로 개발된 주거지 주변에 학교가 신설된 때문으로 보인다.

번천 위 중부고속도로(위), 서하리 비닐하우스(우)
이경하무공적비(좌), 조선백자 요지(우)

번천초교에서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가면, '광주 조선백자 요지' 위에 세워진 건물 옆 안내문이 광주 지역의 도자기 생산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경기도 광주는 조선왕실의 음식을 담당하는 관청인 사옹원 분원이 설치되어 1467년부터 1883년까지 운영되었다.

현재까지 약 400여 기의 요지가 확인되었으며, 그중 중요성이 인정되는 일부 가마터에 대해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어 보존 관리되고 있다. 광주에 분원이 설치된 것은 거리상으로 서울과 가깝고, 한강을 이용해 물품을 손쉽게 이송할 수 있다는 점과 국사봉, 앵자산, 무갑산 등에서 도자 번조에 꼭 필요한 땔감을 풍부하게 조달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광주에서는 분원 설치 전부터 질 좋은 백토를 이용하여 왕실에 공납하는 자기를 생산하고 있었다. 현재 광주 조선백자 요지는 광주시 곤지암읍 곤지암리 471-1번지를 위시하여 총 2백여 필지, 약 39만m²에 달한다. 요지 전시관은 상번천리 522-2번지에 위치하여 당시 가마터의 혼적을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

번천 2리 입구 느티나무(좌), 하천천리 마을 표지석(우)
해공 신익희 생가와 후원의 어록(語錄) 비석

페달을 밟아 상번천 1리에 접한 상번천 2리 골목길로 쓱하고 들렀다가 번천과 나란히 달리는 해공로(海公路)를 따라 내리막길을 달렸다. 차량이 오가는 2차선 아스팔트에 떨어진 꽃잎과 가로변 엔딩을 고하며 떨어지는 벚꽃 잎이 구르는 바퀴에서 어지럽게 흩날린다.


칠사산 북동쪽 자락에 자리한 하번천리로 들어선다. 마을 표지석 옆에 서있는 키 높이 자그마한 대장군 부부 한 쌍이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한다. 자기 얼굴에 볼썽사납게 흙칠을 해 놓은 듯 마을 초입에 쌓여 있는 고철 무더기가 이내 그 미소를 걷어 낸다. 마을 반대편 출구에 서있는 이정표 두 개도 누가 일부러 비틀어 놓기라도 한 듯 모두 방향이 엉터리라 어안이 벙벙하다.


칠사산에서 내리 뻗은 산줄기 자락에 안긴 마을과 넓게 펼친 논밭을 휘감듯 경안천 물길이 휘도는 서하리(西霞里)로 들어섰다. 서하리 안골에서 앞쪽을 바라보니, 겹겹 포개어진 능선 아래로 깊은 골을 감춘 앵자봉과 무갑산이 안개를 휘감고 늠름하게 버티고 서있다.


동네 나무 담장의 '서쪽 하늘에 지는 아름다운 노을의 마을'이라는 글귀가 눈에 띈다. 칠사산을 등지고 경안천을 마주하며 동향으로 자리 잡은 이 마을에서는 서쪽 하늘의 저녁노을을 보기 어려울 것이다. 경안천 건너편 마을에서 바라본 이 마을 뒤 저녁노을이 황홀하거나, 마을 앞 호수처럼 너른 경안천에 비친 노을이 마치 일몰을 보는 듯 장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하리 남동쪽 해공로의 버스정류장 옆에 신익희 선생의 동상과 그의 주요 어록을 새긴 비석 서있다. 빼곡히 적힌 비석의 어록들은 하나같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 특히 정치인들에게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금과옥조나 다름없다.


"남의 의견을 존중할 줄 모르는 정치인은 민주주의를 할 자격이 없다."


"위정자는 모름지기 공평하고 인자하며 깨끗하고 곧아야 한다."


"여러 사람의 일은 여러 사람의 뜻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어느 한 사람이나 몇몇 사람의 뜻으로 이루어짐은 이것이 독재이고 전제인 것이다."


"감투는 머리에 쓰고 다니지 말고 발 뿌리에 놓고 다녀라. 국가 이익을 위하고 국민 복지를 위하는 길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는 미련 없이 그만둘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남의 의견을 존중할 줄 모르는 정치인은 민주주의를 할 자격이 없다."


그는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때 내무차장, 독립 후 1948년 국회의장, 195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등의 이력을 가진 독입운동가요 정치인이었다. 다섯 해 전 여름이 한창이던 때 이곳을 찾았었다. 단아하고 고요한 해공의 생가 마당엔 능소화가 만발했었다.


"범상치 않은 수려한 지세가 인물을 낳는다고 했던가. 서하리는 해공 신익희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문교부장 등 요직을 맡았으며 해방 후 귀국하여 제헌국회의원과 국회의장에 피선되기도 했다.

1956년 제3대 대통령선거 때 그는 이승만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전주 유세를 위해 호남선을 타고 가다가 5.5일 상오 돌연 심장마비로 유명을 달하고 말았다.

5.15일, 민주당 신익희 후보가 빠지게 된 선거는 자유당 이승만과 무소속 진보주의자 조봉암 양자 대결 구도가 되었다고 한다. 이 선거에서 이승만 독재정권에 대한 분노와 신익희에 대한 추모의 표시로 많은 국민들이 고인이 된 신익희에게 기표를 했다고 한다. 20.5%라는 역대 선거 중 최대의 무효표가 나온 이유라고 한다."

_2020.7월 '해공(海公)과 비 내리는 호남선' 中


마을에 자리한 그의 생가 고택 안으로 들어섰다. 고택 뒤 칠사산 자락 비스듬한 경사의 너른 후원에는 그의 어록들을 적은 비석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중에 "민주주의를 위기에서 구하고, 기사회생의 활로를 찾자(救生民主主義於危機 開拓起死回生之)"는 글귀도 보인다.


심산 김창숙 선생 친필 한자 현판이 걸린 '만앙정(萬仰亭)' 툇마루에 걸터앉아 헬멧을 벗고 이마의 땀을 닦았다. 키 높이 담장 옆에서 어린 라일락 한 그루가 서있다. 여린 가지에 연자주빛 성긴 꽃을 피운 그 라일락은 오래전 해공이 그토록 이루고자 했지만, 성장(盛長) 하지 못하고 여전히 여리디 여린 이 땅의 민주주의를 보는 듯했다.


초승달 모양의 궤적을 그리며 서하리를 둘러본 후 정지리 주차장을 향해 페달을 밟아 경안천 보(洑) 위로 난 긴 인도교를 건넌다. 강 한가운데 군데군데 백로가 물속을 응시하고 있고, 가마우지들은 무리 지어 날개를 펴서 말리고 있다.


지쳐서 좀처럼 속도를 내려하지 않는 자전거를 얼러가며 각각 1km 남짓 거리에 위치한 원당리의 일본군위안부역사관과 정지리의 광주조선백자도요지 터를 둘러본 후, 원점으로 돌아오며 라이딩을 마무리했다.


퇴촌면 산수로(山水路)에는 간간이 달리는 차량과 경주라도 하듯 라이더들이 줄지어서 페달을 밟으며 빠르게 지나간다. 나는 내 자전거를 '느림의 미학'으로 길들이며, 멈추어 있는 듯 조용히 흐르는 경안천 저 강물처럼, 쉬지 않고 돌고 도는 계절 따라 쉬엄쉬엄오래도록 바퀴를 지쳐가고 싶다.

25-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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