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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 고결한 땅 뜨거운 피

눈처럼 흰 숨결의 도시

by 꿈꾸는 시시포스


겨울이 막바지로 치닫던 십이 년 전의 2월, 폴란드 바르샤바와 벨기에 브뤼셀로의 출장을 위해 인천공항에서 대한항공 923편에 몸을 실었다. 중간 경유지인 모스크바까지 장장 9시간 반의 비행, 구름 아래로 착륙한 모스크바의 셰레메티예보 공항은 북구의 겨울에 침잠해 있었다.


공항에서 두 시간여 기다린 후, 폴란드 바르샤바행 LO676편에 탑승했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유럽의 겨울 풍경이 조금씩 현실로 다가왔다. 오후 4시 반경, 드디어 바르샤바에 도착했다. 바르샤바의 관문은 ‘피아노의 시인’이라고 불리는 폴란드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쇼팽(Chopin, 1810-1849)의 이름을 딴 프레데리크 쇼팽 공항(Lotnisko Chopina w Warszawie)으로 시내에서 남서쪽 약 10km 거리에 위치한다.


버스를 타고 한 시간가량을 달려, 바르샤바 대학 인근의 Harenda 호텔에 짐을 풀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바르샤바는 순백의 고요 속에 잠겨 있었다. 호텔에 짐을 내려놓자마자 눈발이 가늘게 흩날리는 거리, 고풍스러운 건물들 위로 정적이 내려앉은 도시의 눈길을 따라 성 십자가 성당, 대통령궁, 바르샤바 대학, 잠코비 광장 등 주변을 수박 겉핥듯 잠시 둘러보았다.

프레데리크 쇼팽 공항(Lotnisko Chopina w Warszawie)
바르샤바 구시가지 거리
호텔 복도의 오페라 포스터

바르샤바라는 이름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비스와 강(Vistula River) 근처에 살던 ‘바르스(Wars)’라는 어부가 강에 살고 있던 아름다운 인어 ‘사바(Sawa)’를 만나 함께 살게 된다. 이 둘의 러브스토리가 주민들 사이에 퍼지며, 이 지역이 Warszawa(Wars와 Sawa의 땅)로 불리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에도 창밖에는 눈발이 흩날렸다. K 소장과 약속한 오전 10시에 호텔로비에서 만나 재무부 건물에 있는 그녀 사무실로 향했다. 하늘과 땅 사이에는 여전히 흩날리는 눈발이 가득했고, 온 세상은 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었다. 호텔 맞은편 그녀의 사무실에 도착하여, M 등 네 명으로 구성된 그녀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따뜻한 차 한 잔을 곁들인 환대 속에서 오후까지 업무논의 후, 저녁 만찬을 함께 하기로 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자투리 시간에 쇼팽 박물관, 잠코비 광장(Plac Zamkowy), 인어상, 퀴리 박물관, 성 요한 성당 등 구시가지의 가까운 명소들을 스쳐 지나며 걸었다.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이자, 유일한 물리학상과 화학상 동시 수상자인 퀴리(Maria Skłodowska-Curie, 1867-1934)를 기념하는 박물관을 둘러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바르샤바의 인어(Syrenka Warszawska)像

차갑지만 그다지 추위가 느껴지지 않은 바르샤바의 겨울은 마치 조용한 클래식 음악처럼 정제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구시가지의 건물은 제2차 세계대전 때 거의 다 파괴되었지만, 옛 모습대로 재건했다고 한다. 복원된 옛 건물들이 둘러선 구시가지 광장 가운데 바르샤바의 인어(Syrenka Warszawska) 동상이 자리한다. 바르샤바의 수호신으로 알려진 이 인어(人魚)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발트해에 살던 인어 자매가 여행을 떠났다. 그중 언니는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동생은 바르샤바에 정착하게 되었다. 한 상인이 인어의 아름다운 노래를 팔면 큰돈을 벌 것이라 생각해 인어를 잡아 가뒀다. 인어는 매일 밤 구슬픈 목소리로 풀어달라고 애원했고, 어부의 아들이 친구들과 함께 인어를 구해준다. 은혜를 입은 인어는 그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와주기로 서약한다. 그래서 이 인어는 이 도시의 수호신이 되었다.”

바르샤바음악원 옆에 쇼팽 박물관이 자리한다. 그리 크지 않은 박물관에는 쇼팽의 생애, 유품, 악보, 편지, 피아노 등이 전시되어 있고, 그의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디지털 음원 설비도 갖춰져 있다. 감상 부스에 앉아 헤드폰을 끼자, 그의 대표적 피아노 독주곡 녹턴(Nocturne, 야상곡)의 은은한 선율이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허무한 슬픔의 아름다움, 피아노로 쓴 시(詩), 추억을 소환하는 짙은 안개비와 어울리는 명곡, 눈 덮인 선자령이 떠오르는 선율, 형용할 수 없는 영롱함과 아련한 그리움,... 그의 음악은 뭇사람들에게 감동과 위로를 주며 불후의 명곡으로 사랑받고 있다.

쇼팽의 심장이 잠들어 있는 성 십자가 성당(좌)/쇼팽 박물관(우)

저녁, 호텔 옆 코페르니쿠스 동상 앞에서 다시 만난 K, M과 함께 눈길을 따라 구 시가지로 걸어갔다. 그가 살았던 당시 진리처럼 믿어온 천동설의 오류를 지적하고 지동설을 주장하여 이른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온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Mikołaj Kopernik, 1473-1543), 그의 동상이 이곳에 자리하는 것은 그가 폴란드의 토룬(Toruń)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은은한 조명이 깔린 고즈넉한 식당에서 따뜻한 맥주 한잔과 함께한 저녁은 낯선 도시와 폴란드 여인들이 마치 오랜 친구처럼 느끼게 해 주었다. 천 년이 넘는 맥주 양조 역사를 가진 폴란드는 유럽에서 세 번째로 큰 맥주 생산국이라고도 한다. 길고 추운 겨울철에 마신다는 따뜻하게 데운 맥주(Grzane Piwo)를 마시는 특별했던 경험도 잊을 수 없다.


브뤼셀로 이동하는 날 새벽녘 잠에서 깨었다. 여전히 그치지 않고 눈이 내리고 있는 거리로 나서 호텔 옆 바르샤바 대학 구내를 조용히 둘러보았다. 1816년 설립된 이 대학의 캠퍼스,‘겨울 눈 풍경이 아름답기’로 이름난 그 캠퍼스를 눈 내리는 겨울에 제대로 감상하는 행운을 누리게 될 줄이야. 온통 눈에 덮인 텅 빈 대학 캠퍼스는 동화 속 풍경처럼 고요하고 신비스러웠고,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늘어선 구시가지 거리에 눈발이 흩날리는 모습은 샤갈의 그림처럼 몽환적이었다.

바르샤바대학 부근 거리
코페르니쿠스 동상

아침 식사 후 체크아웃을 하고 짐은 호텔에 맡긴 채, 신시가지 방향으로 발길을 옮겼다. 구시가지와 달리, 신시가지는 일상의 분주함과 긴장감이 도는 분위기이다. 구 소련 시기 스탈린이 지어준 42층 높이의 문화과학궁전(Palace of Culture and Science)은 사회주의시대를 상징하는 기념비인양 여전히 바르샤바 시내를 굽어보고 있다. 돌아오는 길에 바르샤바 중심가인 크라코프 거리(Krakowskie Przedmieście)에 위치한 성 십자가 성당(Kościół Świętego Krzyża)에 들렀다. 성당에서는 마침 미사가 진행 중이었다. 파리에서 생을 마감한 쇼팽은 자신의 심장을 고국에 묻어달라고 했다.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심장은 란드로 돌아와서 이 성당의 중앙 기둥에 안치되어 조용히 영면하고 있다.


흰색과 붉은색이 같은 너비의 가로선으로 되어 있는 폴란드의 국기(Flaga Polski)는 18세기부터 폴란드를 상징하는 기로 쓰였다고 한다. 흰색과 붉은색은 각각 환희와 독립을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K는 그 색깔이 각각 흰 눈이 덮인 땅과 폴란드인의 뜨거운 피를 의미한다고 했다.

비록 바르샤바서의 짧은 체류였지만 뜨거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흰 눈에 덮인 아름다운 땅에 대한 깊은 인상을 남기는 여정이었다. 오후에 택시로 쇼팽 공항에 도착하여, 폴란드 국영 LOT233편에 몸을 싣고 동화처럼 신비한 눈의 도시 바르샤바와 작별했다.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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