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베이징 외곽의 쓰마타이 장성
추위가 맹위를 떨치던 이십여 년 전 일월, 국제기구 사무실로 발령을 받고 베이징에 도착했다. 익숙해진 듯 여전히 낯선 베이징에서의 생활이 석 달이 되어가는 춘삼월의 마지막 토요일 아침, 그날도 뿌연 안개가 베이징 도심을 감싸고 있었다. 전날 “내일은 만리장성에 가볼까?” 했던 말이 씨가 되어 아침부터 집 안이 분주해졌다. 간단히 아침을 들고, 전에 몇 번 이용했던 택시기사 쑨(孙)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목적지는 베이징 교외 북서쪽에 자리한 ‘빠다링(八达岭; 팔달령)’이라 불리는 만리장성이다.
만리장성은 말 그대로 ‘긴 성’이다. 그러나 그 길이만큼이나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 베이징 인근만 해도 네 곳의 주요 구간이 있다. 우리가 향한 빠다링은 그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구간이다. 고속도로 접근이 용이해 단체 관광객이 가장 많이 몰리며, 관광 인프라가 잘 정비되어 있다.
그에 비해, 무텐위(慕田峪; 모전욕)는 조용한 자연 속 장성의 분위기를 느끼기에 제격으로 울창한 숲과 청명한 공기, 깔끔한 시설로 가족 단위 관광객에게도 인기가 많다. 더 거친 산세를 자랑하는 쓰마타이(司马台; 사마대)는 야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하고, 장성의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구간 중 하나인 진산링(金山岭; 금산령)은 마치 역사의 파편이 그대로 박제된 듯한 풍경을 자아낸다.
고속도로를 한 시간 반 달려 도착한 빠다링 장성 입구는 이미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단체버스에서 쏟아져 나온 이국의 사람들, 그 틈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한국말까지, 낯선 듯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우리는 위쪽 케이블카 승강장에서 입장료와 케이블카 요금을 합쳐 1인당 100위안을 내고, 6인승 케이블카에 올랐다. 아이는 1.2m 미만이라 ‘미엔페이(免费)’ 무료이다. 케이블카는 능선을 타고 구불구불 오르며 장성의 등줄기를 따라 올라갔다. 성벽 위에 발을 디디자, 마치 살아서 꿈틀대는 거대한 용의 등 위에 올라탄 듯한 느낌이다. 온갖 민족과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함께 걷는 이 고대의 요새는 그 자체로 역사와 현재가 공존하는 무대였다.
정상 부근에는 모택동(毛泽东) 주석의 휘호가 새겨진 비석이 서 있었다. “不到长城非好汉” — 장성에 오르지 않으면 진짜 사나이가 아니라는 의미다. 관광객들은 그 앞에서 밝은 표정으로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길게 서 있었다. 단지 정치 지도자에 대한 경의 때문일까, 아니면 이곳에서의 ‘성취’를 기념하기 위해서일까.
장성을 내려온 뒤, 우리는 택시를 타고 창핑구(昌平区)로 향했다. 이곳에는 중국 명나라 황제 13명이 잠든 명 13 릉(明十三陵)이 있다. 이곳은 풍수지리상 최고의 명당으로 꼽힌다. 좌청룡 우백호, 후현산 전주수(後玄山 前珠水)의 형국 속에 조성된 황릉은 그 자체로 한 왕조의 권위와 풍수적 철학이 반영된 형국이다.
우리가 방문한 정릉(定陵)은 명 13 릉 가운데 유일하게 발굴된 지하궁전이다. 명 신종 주이쥔(朱翊钧)과 두 명의 황후가 함께 묻힌 무덤으로, 깊은 지하 공간이 인상적이다. 정원처럼 꾸며진 능원, 제례를 올리던 비각(碑阁), 그리고 정중한 분위기 속 보안검색을 거쳐 내려가는 지하궁전. 수세기 전 황제가 묻힌 공간임에도, 지금까지도 무언가 신성한 기운이 감도는 듯했다. 지하릉을 나와 한가로이 거닐며 기념품점에서는 엽서 한 통을 샀다.
정릉을 뒤로하고, 왕징(望京)의 집으로 향했다. 왕징은 베이징 동북부의 국제적 거주 지역으로, IT기업과 외국계 회사가 밀집해 있는 신흥 상업지구다. 특히 한국인 밀집지역으로도 알려져 있어 ‘베이징의 강남’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날 저녁은 왕징 명도원에 거주하는 H네 식구와 부근의 샹만러우(香满楼) 식당에서 전통 베이징 덕(北京烤鸭)으로 마무리했다. 오리의 껍질은 바삭하고 속살은 촉촉해, 얇은 밀전병에 파채와 된장, 오이를 곁들여 싸 먹는 그 맛은 이국적이면서도 오묘하게 입에 잘 맞았다. 베이징 덕은 원래 황실 연회 음식으로, ‘황제가 먹던 오리’라는 별명이 있다.
저녁을 마치고 일행은 따왕로(大望路)의 우리 집으로 자리를 옮겨 따뜻한 차 한 잔을 나누며, 각자의 감상을 주고받았다. 말도 문화도 음식도 다른 중국에서의 하루가 이렇게 지나갔다. 밤이 깊어가고, TV에선 영화 ‘불후의 명작’이 방영되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 하루가 바로 우리 가족에게 불후의 명작 같은 추억이 되지 않을까.”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