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더 기행과 박지원의 《열하일기》
이십여 년 전 여름 어느 날, 나는 단기유학 중인 P형과 베이징 기차역에서 청더(承德) 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겨울의 무지막지한 추위와 더불어 여름의 더위 또한 베이징 생활의 고역 중 하나다. 베이징에서 260km 떨어진 청더는 여전히 여름의 열기가 남아 있었고, 동시에 청나라 제국의 흔적이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
청더의 중심은 단연코 피서산장(避暑山庄)이다. 명·청제국의 법궁이 북경 자금성이라면, 피서산장은 제국의 여름 수도이자 정치의 주변부였지만 오히려 여유와 문물의 교류가 더 풍부했던 공간이다. 건륭제는 북경의 더위를 피해서 이곳에서 제국을 통치했고, 티베트와 몽골 등의 왕공들이 이곳에 조공을 올리며 제국의 다문화 체제를 과시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240여 년 전 여름, 청나라의 열하(熱河; 현 承德)에 도착한 조선 관료가 있었으니, 곧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다. 그는 1780년(정조 4년)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사신단의 수행원 자격으로 이곳을 다녀온 경험을 《열하일기(熱河日記)》에 담아냈다. 그는 1780년 8월 1일 한양을 출발하여, 의주, 압록강, 봉황성, 심양, 산해관, 북경을 거쳐 8월 31일에 열하에 도착했고, 9월 초순까지 머문 후, 북경, 심양, 의주를 거쳐 10월에 귀국했다.
박지원은 이곳의 정원과 건축, 제도와 풍속, 상업과 물류, 사람들의 모습까지 꼼꼼히 관찰했다. 그리고 조선의 낙후된 경제 구조와 보수적인 유교 질서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피서산장은 건륭제가 집무를 보던 전각과 호수, 정자들이 고즈넉하게 어우러져 있다.
예전 황제들이 가마를 타고 지나던 길을 우리는 전동열차 타고 언덕 위로 올라 보타종승지묘(普陀宗乘之庙)를 내려다보았다. 1767년, 건륭제가 황태후의 80세 생일을 기념하여 포탈라궁을 모방해 지은 이 사원은 라마불교와 중국 궁정 양식이 절묘하게 섞인 ‘문명 혼합’의 상징이다. 박지원은 이곳에서 ‘숭유배불(崇儒抑佛)’의 배타적이고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유교사상이 뿌리 깊게 자리한 당시의 조선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종교와 문화에 대한 관용과 융합을 목도했을 것이다.
보타종승지묘를 뒤로하고 보녕사(普寧寺)로 향했다. 그 입구 난간엔 연인들이 ‘한 번 채우면 열 수 없는 맹세’의 증표로 잠가 놓은 이름이 새겨진 자물쇠가 촘촘히 걸려 있다. 보녕사는 라마불교와 한족불교, 그리고 중국 민간신앙이 혼재한 공간이다. 향을 사르는 사람들의 기도는 건강과 재물, 출세를 향한 것이고, 어느 불상 앞에서든 절하는 모습은 종교보다는 ‘기복’ 그 자체에 가깝다. 박지원 역시 《열하일기》에서 “향을 태우고 점을 치는 장면은 도처에서 볼 수 있으되, 신앙이라기보다는 생활의 관습 같다”라고 서술한 바 있다.
근처 관제묘(關帝庙)에서는 삼국지의 관우가 ‘재신(財神)’으로 숭배되고 있다. 조선에서는 도의와 용장의 상징인 관우가 이곳에선 장사를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변모해 있었다. 이와 같은 현세적 실용주의 문화는 당시 박지원에게도 자못 의아하게 와닿았을 것이다. “도의(道義)는 곧 민생 위에 서야 한다”는 그의 북학 정신은 이처럼 이질적인 문화의 충돌 속에서 싹트지 않았을까.
예정에 없던 일정이지만 경추봉과 보락사(普乐寺)도 함께 둘러보기로 했다. 경추봉은 방망이처럼 솟은 암봉으로 봉추산(棒槌山)이라고도 불린다. 케이블카를 타고 도달한 봉우리 아래에서 올려다 보는, 마치 하늘을 찌르듯 솟아 있는 60미터 높이의 바위봉우리가 경이로웠다. 청더 어디서든 보이는 이 암봉은 자연의 위엄이자, 황제의 권력을 상징하듯 우뚝 서 있다.
다음으로 들른 보락사(普乐寺)는 청 건륭제가 1766년 세운 사찰로, 북경의 천단을 본떠 금색 돔 지붕을 얹은 독특한 라마사원이다. 이 사원은 티베트, 몽골, 한족 등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어우러진 청 제국의 다문화주의를 대변한다. 조선 사신단의 눈에 비친 이국적이고 위엄스러운 건축물들은 고리타분한 이념과 사상을 넘어선 ‘이용후생(利用厚生)’이라는 실학정신의 자극제가 되었을 것이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현실에 대한 가감 없는 고민, 해학과 풍자가 가미된 문체, 파격적인 내용 등으로 인해 당대에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문장이 저속하다는 이유로 정조로부터 반성문을 쓰도록 하명받기도 했다. 시대를 앞서가는 선각자의 고난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듯 하다.
이튿날, 어젯밤 내린 비가 걱정이었지만 다행히 아침은 맑았다. 첫날 가이드 시아(夏) 양을 대신하여 장(張) 양이 안내를 맡았다. 다시 찾은 보녕사 인근 도로변 노상에서는, 옛 복장을 입은 상인들이 전통 물품을 팔며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다시 보는 보타종승지묘는 티베트 풍 전각들이 언덕을 따라 늘어서 있고, 정상에는 위용을 자랑하는 본전이 자리해 마치 다른 세상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준다. 황금 지붕 위에 남겨진 일제의 약탈 흔적은, 화려함 이면의 아픈 역사로 다가왔다.
돌아오는 길에 들른 관제묘 한편의 서방(书房)에선 한 붓글씨 장인이 화선지에 붓글씨를 쓰고 있었다. P형과 나는 각각 한 점씩 부탁하자 그는 망설임 없이 쓰기 시작했다.
“물이악소이위지 물이선소의불위(勿以惡小而爲之 勿以善小而不爲)_작은 악이라 하여 행하지 말고, 작은 선이라 하여 행치 말지 마라)”.
그 장인은 명심보감에 나오는 위 글귀와 더불어 내 이름을 묻더니 흔쾌히 ‘미엔페이(免費)’_무료라며, 그 어두에 ‘증 장...(贈 张**)’이라는 글씨와 함께 휘호 한 장을 덤으로 써주는 선심을 베푼다.
“공도자연성(功到自然成)_노력을 다하면 자연히 이루어진다.”
청더에서의 감흥과 더불어 기억에 남는 선물을 손에 들고, 호텔에서 짐을 꾸려 두 가이드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고 청더 기차역으로 향했다.
여행의 피로를 안은 채, 18세기 말 조선의 사신 박지원이 청더에서 느꼈을 문화적 충격과 감회를 떠올리며, 나는 여전히 여름의 열기로 뜨거운 베이징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