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체른에서 네샤텔까지
언제부터인지 ‘스위스’라는 단어만 들어도 마음속에 투명한 물빛이 번진다. 눈 덮인 봉우리와 알프스 마을, 차분히 흐르는 강과 고요한 호수, 그리고 그 속에 사는 정겨운 사람들의 모습까지. 그런 이미지를 품은 채, 나는 파리 북역에서 야간버스에 몸을 실었다. 우리나라가 IMF 사태에 직면하기 직전, 벨기에 브뤼셀에 체류하고 있을 때였다. 창밖은 여름인데, 마음은 이미 만년설을 이고 있을 스위스의 알프스로 향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여덟 시, 스위스 중부의 아름다운 호수의 도시 루체른(Luzern)에 도착했다. 밤새 어둠을 달려온 몸은 피곤했지만, 첫 발을 내딛는 순간 그 모든 것이 씻겨 내려갔다. 호수의 수면은 거울처럼 맑았고, 그 위를 느긋하게 미끄러지는 백조들은 이국의 아침을 열고 있었다.
루체른은 피어발트슈테터 호수(Vierwaldstättersee/Lake Lucerne) 끝자락에 자리한 도시다. 커다란 빙하가 녹으며 만든 깊은 호숫가에 자리한 이 도시는, 한 폭의 풍경화처럼 정돈된 느낌이다. 14세기에 지어진 고색창연한 목조 다리 ‘카펠교(Kapellbrücke)’를 건너며, 나는 잠시 중세의 시간 속으로 되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수세기 동안 홍수와 전쟁, 화재를 견뎌낸 카펠교에는 루체른의 역사와 전설을 그린 목판화가 줄지어 있어, 이 도시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구 시가지의 붉은 지붕과 바람에 한들거리는 창가에 매달린 화분의 꽃들은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무심한 듯 다정한 마음씨를 잘 드러내고 있다.
도시 남쪽, 숨 무성한 공원의 바위벽에 숨겨 놓은 듯 자리한 빈사의 사자상(Dying Lion Monument)은 프랑스혁명 당시 희생된 스위스 용병을 기리는 조각이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 속에 위엄을 잃지 않으려는 사자의 몸짓 속에 스위스 용병의 용맹과 충절이 배어있다. 유람선을 타고 호수 위를 가로지르자, 파란 하늘의 뭉게구름과 그림 같은 마을들이 수면 위에 어른거리고, 이따금 작은 요트가 수면에 비친 풍경을 흩트리며 옆을 스쳐 지나간다.
다음날은 보다 깊은 산을 향한 여정이었다. 인터라켄(Interlaken)은 이름 그대로 브리엔츠 호수와 툰 호수 사이에 놓인 스위스 중부의 대표 도시로 알프스의 관문이라 불린다. 거리마다 여행객이 가득하고, 산악 액티비티를 알리는 간판들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우리는 산악열차에 올라 라우터브루넨에서 산간열차로 갈아타고 점차 고도를 높여갔고, 눈앞에는 점점 더 큰 화폭의 아름다운 풍경화가 펼쳐졌다.
도착한 곳은 해발 1,600미터로 자동차조차 진입할 수 없는 마을 뮈렌(Mürren)이었다. 여름 햇살 속에서도 눈이 시릴 만큼 하얀 눈을 머리에 인 알프스의 3대 봉인 아이거(Eiger), 융프라우(Jungfrau), 뮌히(Mönch)가 나란히 깊은 계곡 건너에서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마을 뒤로 넓게 펼쳐진 푸른 풀밭에서 자유로이 풀을 뜯고 있는 젖소 떼와 티 없이 맑은 하늘은 아름다운 한 장의 그림엽서나 다름없어 보인다.
오후엔 스위스의 수도 베른(Bern)으로 향했다. 연방정부 정치적 중심지인 이 도시에는 놀랍도록 소박한 품격이 흘렀다. 아레강(Aare River)이 도시를 둥글게 감싸며 유유히 흐르는 이 도시의 구시가지는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도시 이름이 ‘곰’에서 유래된 베른에는 곰 공원(Bärengraben)을 비롯해서 시계탑(지트글로게), 고딕양식의 베른 대성당, 거리마다 박혀 있는 조각 분수 등 중세 도시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수 세기 동안 무수한 사람들이 지나다녔을 돌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시간도 아레강의 강물처럼 천천히 느리게 흐르기 시작하는 느낌이다. 광장 근처의 작은 음식점에서 스파게티와 맥주로 저녁을 간단히 마무리했다. 소란한 음악이 들리는 호텔로 돌아오는 길, 고요한 이 도시도 변화무쌍한 인간의 내면처럼 어딘가에 거친 열정을 감추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정의 마지막은 네샤텔(Neuchâtel)이었다. 스위스 북부의 프랑스어권 지역에 해당하는 이 도시는 전형적인 스위스 마을의 면모를 지녔다. 오래된 성곽길을 따라 마을을 걷다 보면, 마치 14세기의 골목을 여행하는 기분이 든다. 작은 교회와 벽돌지붕, 조용한 골목,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호수. 수면 위로는 갈매기와 백조가 떠다니고, 배들이 조용히 닻을 내린 채 파도에 흔들린다.
여행이 짜인 일정대로 끝나고 귀로에 올랐다. 스위스에 걸맞은 의태어로는‘아기자기’라는 단어가 생각난다. 단정한 마을과 아담한 거리, 조용한 길과 멈추어선 듯한 시간, 그 속에 융프라우처럼 가늠할 수 없는 높이와 깊이의 온도. 어쩌면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것은 얼어붙어 있는 우리 안의 감각과 감흥을 녹여 불러일으키기는 바람을 쐬러 나서는 것인지도 모른다. 루체른의 호수, 뮈렌의 설산, 베른 아레강의 다리, 네샤텔의 성곽길. 그 위에서 나는 온전히 따스한 스위스의 바람에 안겨들었었다.
다시 파리를 향하는 버스 안에서, 낯설었던 얼굴들은 어느새 친숙해져서 즉석으로 펼쳐진 버스 안 노래자랑에서 하나 둘 손을 들며 노래를 자청했다. 에펠탑의 실루엣이 차창에 어슴푸레 걸릴 때, 사람들은 하나둘 짐을 정리하고 현실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나는 다시 라데팡스 지하철에 올라 K 씨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그날 밤,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루체른의 호수와 뮈렌의 눈 덮인 봉우리들 사이에서 잠에 빠져들었다. 9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