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몰 무렵의 서호(西湖)
중국 동부 저장성(浙江省)의 성도(省都)인 항저우(杭州, Hangzhou)는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항저우(杭州)는 단순한 관광 도시가 아니라, 일찍이 남송(1127–1279)의 수도로 역사적, 문화적으로도 매우 유서 깊은 도시이다. 서호의 풍경처럼 고요하면서도 깊은 내면을 지닌 이 도시는 수많은 문화유산과 함께, 오랜 역사 속에서 숙성된 음식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특히 항주의 대표적인 세 가지 요리인 시후추위(西湖醋魚), 동포러우(東坡肉), 용징시아(龍井蝦仁)는 단순한 맛을 넘어, 그 하나하나 탄생 스토리를 갖고 있는 전통 요리다.
시후추위(西湖醋魚)는 우리말로 풀어쓰면 '서호 초어 식초 찜'이다. 이 요리는 항주의 상징인 서호에서 잡은 초어를 주재료로 하며, 식초와 설탕을 이용해 새콤달콤한 맛을 내는 것이 특징이다. ‘숙수전진(叔嫂傳珍)’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데, 북송 시기의 송오수가 병든 시동생의 입맛을 돋우기 위해 만든 것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단맛과 신맛이 조화를 이루는 이 요리는, 마치 서호의 수면 위로 번지는 아침 안개처럼 섬세하면서도 인상적인 여운을 남긴다. 혀끝에 감도는 산뜻한 감칠맛은, 한 도시의 따뜻한 가족 이야기를 품은 채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동포러우(東坡肉)는 돼지의 두터운 삼겹살을 푹 익혀 만드는 요리로 밝은 붉은빛을 띠며, 부드러운 식감과 풍부한 육즙이 입안 가득 퍼진다. ‘동포(東坡)’는 송나라의 시인이자 정치가였던 소동파(蘇東坡)의 호이다. 그는 항주의 태수로 재임할 당시 서호를 준설하는 백성들을 위해 이 요리를 고안했다고 한다.
고기의 진한 풍미와 부드러운 질감은 단순한 미식 이상의 감동을 전하며, 시인다운 인간미와 배려의 정신이 한 접시에 담겨 있다. 겉은 고소하고 속은 부드러운 둥포러우는 격식 없이 따뜻한 정을 건네는 항주의 얼굴이라 할 수 있다.
용징시아(龍井蝦仁), 즉 '용정 차 새우 요리'는 청명절 전후로 수확한 고급 항저우의 용정차와 민물 새우살을 함께 조리해, 연한 색감과 산뜻한 향을 자랑한다. 이 요리는 보기에도 우아하고, 맛 또한 담백하며 기품 있다.
투명한 새우살은 혀끝에서 살살 녹고, 차 향은 그 뒤를 따라 은은하게 퍼진다. 그야말로 봄날의 서호를 닮은 맛이다. 음식 하나로 절제된 미학을 표현한 이 요리는 항주의 기품 있는 정서를 오롯이 느끼게 해 준다.
항주의 음식은 단순한 배채움의 수단이 아니다. 각각의 요리에는 시간과 기억, 그리고 사람의 이야기가 스며 있다. 시후추위에는 가족 간의 정이, 둥포러우에는 시인의 따뜻한 리더십이, 용정시아에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섬세한 미학이 깃들어 있다.
이처럼 항주의 3대 명요리는 그 도시의 역사와 정신을 오롯이 담아낸, '먹는 문화유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래전 항저우를 방문했을 때, 항주 3대 요리를 한자리에서 모두 접한 특별했던 기억이 떠올라서 정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