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와 베이징의 추억
중국 베이징 생활 중 커다란 위안이자 소확행 중 하나는 영화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영화관을 찾아간 것은 아닙니다. 2004년 당시 베이징에는 거리 곳곳에 허름한 DVD 가게가 쉽게 눈에 띄었습니다.
당시는 짝퉁이 판을 치던 시절이라 한국에서 개봉된 영화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아 베이징의 DVD 가게에서 구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당시 환율로 치면 우리 돈 1200원 정도인 10위안 내외의 푼돈으로. 자전거를 타고 집 근처 골목골목을 헤집고 DVD 가게를 찾아서 새로 개봉되었거나 구미를 당기는 희귀한 영화의 DVD를 물색하곤 했었습니다.
주로 한국 등 외국 영화를 중국어 자막을 넣어 구운 것인데, 운이 좋은 날에는 중국이나 일본 등의 작품에 한국어 자막을 넣은 것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접한 수많은 영화들 가운데 잊을 수 없는 작품 중 하나가 왕샤오슈아이(王小帅) 감독의『베이징 자전거(十七岁的单车; 열일곱 살의 자전거; Beijing Bicycle, 2001)』입니다.
영화 줄거리
중국 농촌 출신의 17세 청년 꾸이(小贵, 崔林 분)는 더 나은 삶을 꿈꾸며 베이징으로 올라와 택배 회사에 취직합니다. 그는 600위안을 모으면 회사에서 빌려준 은색 자전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희망으로, 건당 10위안을 받으며 성실히 배달일에 매진합니다. 자전거는 그에게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자산이자 생존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전거를 도난당해, 회사 규정에 따라 월급에서 물어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꾸이는 베이징 시내를 헤매며 자전거를 찾아다니다가 거리에서 자신의 자전거를 타고 있는 고등학생 젠(小坚, 李滨 분)을 발견합니다. 젠은 친구들에게 과시하려고 도둑 자전거를 중고로 구입한 상황. 결국 자전거를 돌려달라는 꾸이와 중고 시장에서 샀다고 주장하는 젠 사이에 격투가 벌어지고, 결국 둘은 자전거를 번갈아 사용하기로 타협하게 됩니다.
하지만 젠은 자전거를 통해 자존감을 얻었기에, 꾸이가 나타날 때마다 체면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두 사람은 점점 더 서로의 삶 속으로 얽혀 들어가며, 각기 다른 욕망과 처지가 충돌하게 됩니다.
결말, 그리고 사회적 메시지
꾸이와 젠은 결국 자전거를 두고 갈등을 이어가다, 또다시 격렬하게 충돌합니다. 싸움 끝에 자전거는 망가지고 맙니다. 두 사람 모두 더 이상 자전거를 제대로 쓸 수 없게 되면서, 각자의 꿈과 자존심도 함께 부서져 내립니다. 영화는 둘 중 누구도 완전히 승리하거나 자전거를 온전히 가지지 못한 채, 상처만 남긴 씁쓸한 현실을 보여주며 끝납니다.
중국 제6세대 감독을 대표하는 왕샤오슈아이(王小帅)는 『베이징 자전거』를 통해 급격히 도시화·시장화되는 중국에서 시골 출신 노동자(민공, 民工)와 도시 청년 간의 계층 격차를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꾸이에게 자전거는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니라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계의 수단이자 존재의 기반이며, 젠에게는 가난 속에서도 친구들에게 체면을 유지하게 해주는 청춘과 사회적 지위의 상징입니다. 영화는 한 대의 자전거를 두고 두 청년이 부딪히는 과정을 통해, 도시화 속에서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계층 간 간극과 청춘의 허무를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잔잔하지만 씁쓸한 결말은 물질적 소유를 넘어, 꿈과 희망마저 쉽게 상처받는 청춘의 허무함을 느끼게 합니다. 북적이는 베이징의 거리와 삭막한 고층 건물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단함이 감독의 담담한 연출로 더욱 깊이 다가와, 도시화가 만들어낸 불평등과 소외의 그림자를 오래도록 되새기게 하는 작품입니다.
중국 영화 6세대 감독
중국 영화에서 '6세대 감독(第六代导演)'은 문화 대혁명 직후 태어나 개혁개방 시대를 살아온 세대로, 1980년대 후반부터 등장해 주로 1990년대 이후 활동을 본격화한 감독들을 말합니다.
중국 역사와 전통, 민족 서사를 스펙터클 하게 다룬 장이머우, 천카이거 등 5세대 감독들과 달리, 왕샤오슈아이(王小帅)를 비롯한 6세대 감독들은 주로 도시 빈곤, 젊은이들의 방황, 사회 부조리, 하층민의 삶 등 중국의 사회 문제와 개인의 소외를 집중적으로 탐구합니다.
지아장커(贾樟柯) 감독은《스틸 라이프(三峡好人)》에서 삼협댐이라는 국가 프로젝트의 거대한 개발 뒤에 묻힌 서민들의 삶과 이별, 기억의 상실을 담담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루예(娄烨) 감독은《수족관(苏州河, Suzhou River, 2000)》에서 상하이 어두운 수로와 퇴락한 거리를 배경으로 도시화의 이면과 인간의 고독, 사랑의 불확실성을 그려냈습니다. 장위안(张元, Zhang Yuan) 감독은 중국에서 동성애가 사회적으로 터부시되던 시절, 동성애자의 내면과 정체성을 직접적으로 다룬 중국 최초의 본격적인 퀴어 영화인《동궁서궁(东宫西宫, East Palace, West Palace), 1996년》을 만들었습니다.
이들 작품은 대규모 자본과 화려한 영상 대신, 저예산 독립영화 스타일로 도시와 주변부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린 사회 비판적인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여러 작품들이 해외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하는 등 수작들로 평가받고 있는데, 정작 본국에서는 검열과 통제로 인해 주로 해외에서 먼저 공개되고 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 사진 출처 및 내용 참고: 바이두(百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