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격류에 휩쓸린 비애의 가족사
이 영화의 원제는《귀래(归来), 영어 제목: Coming Home)》 로 2014년 거장 장이머우(张艺谋) 감독이 연출하고 공리(巩俐)와 첸다오밍(陈道明)이 주연한 중국 영화이다.
이 작품은 문화 대혁명이라는 중국 현대사의 비극적 시기를 배경으로, 한 가족이 겪는 상처와 회복되지 않는 사랑을 깊이 있게 그려낸다. 영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 루옌스(陆焉识, 첸다오밍 扮)는 지식인 출신으로, 문화 대혁명 당시 반혁명분자로 몰려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된다. 그는 가족과 떨어져 오랜 시간을 보낸다. 그의 부인 펑완위(冯婉瑜, 공리 扮)는 남편이 떠난 후에도 한결같이 그를 기다리며 살아간다.
루옌스가 탈출해서 돌아오겠다던 5월 5일, 그들의 딸 단단은 무용수로 발탁되기 위해 체제에 협조하고자 아버지의 탈출 시도를 당국에 밀고하게 된다. 이로 인해 루옌스는 다시 붙잡혀 수용소로 끌려가고, 가족 간의 틈은 더욱 깊어진다.
이 사건 이후 여주인공 펑완위는 매년 5월 5일이면 “陆焉识(루옌스)”라고 적은 종이를 손에 들고 기차역으로 남편을 마중하러 간다. 이는 강제 격리되었던 남편 루옌스가 "5월 5일에 돌아오겠다"라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약 20년이 흐른 뒤 루옌스는 정치적 복권으로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오지만, 아내 펑완위는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남편이 잡혀갈 때의 심리적 충격으로 인해 심인성 기억장애(선택적 기억상실)를 앓게 되었던 것이다. 그녀의 기억은 과거와의 경계가 무너진 상태에서, 남편이 체포되던 약 20년 전의 그 순간에 머물러 있다.
여전히 매년 5월이면 남편을 마중하러 기차역으로 나가는 펑완위, 이는 잃어버린 시간과 사랑, 그리고 회복되지 못한 상처를 상징하며, 영화 전체의 주제인 기억, 기다림, 용서를 깊이 있게 드러낸다.
루옌스는 그 기막힌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녀 곁에서 묵묵히 함께하며 삶을 이어간다. 그는 자기 존재를 강요하지 않고, 매년 5월 5일 아내와 함께 그녀 기억 속의 '루옌스'를 마중하러 기차역으로 나간다. 또 과거의 흔적이 담긴 편지나 사진을 함께 읽으며 그녀의 기억을 자극하려 한다. 딸 단단 역시 뒤늦게 자신이 저질렀던 일을 뉘우치고 가족의 화해를 시도하지만, 과거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이 영화는 극적인 반전이나 감정의 폭발 없이 끝난다. 펑완위는 끝내 남편을 알아보지 못하고, 루옌스는 아내가 남편을 기다리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함께 한다. 영화는 그렇게 기억을 잃은 이와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이가 서로를 지키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사랑과 기다림의 진정한 의미를 되묻는다.
《오월의 마중》은 사랑이란 무엇인가, 기억을 잃은 사람 곁에 남아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한 시대가 남긴 상처는 어떻게 회복될 수 있는가에 대해 조용히 질문을 던진다. 공리는 기억을 잃은 아내 역할을 섬세하게 표현했고, 첸다오밍은 고요하지만 깊은 정서로 절제된 감정을 전달해 영화의 중심을 잡았다. 이 영화는 개인과 가족, 기억과 사랑, 그리고 용서와 속죄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은 인간적인 영화로 기억된다.
장이머우 감독은 공산당이 엄연히 지배하고 있는 현 체제에서, 어떻게 문화 대혁명이라는 중국 현대사의 가장 비이성적이고 광포한 시기를 일면 비판적으로 담은 영화 『归来(귀래, Coming Home)』를 만들 수 있었을까?
그 배경에는 몇 가지 중요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장예모 특유의 ‘우회적 서사’ 방식이다. 『귀래』는 문화 대혁명을 정면으로 고발하거나 직접적인 정치 비판을 시도하지 않는다. 대신 한 가족의 비극—반혁명분자로 몰려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남편, 그리고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아내—을 통해, 이념의 폭력과 그로 인해 파괴된 인간관계를 감성적으로 그려낸다. 체제 자체에 대한 비판보다는, 이념에 휘둘린 개인의 고통과 상처를 섬세하게 묘사함으로써 중국 당국의 검열을 비교적 무난히 통과할 수 있었다. 이처럼 직접적인 고발보다는 상징과 은유, 정서적 접근을 택함으로써 장예모는 중국 내 표현의 한계를 돌파할 수 있었다.
둘째, 시대적 배경도 영향을 미쳤다. 『귀래』가 제작·개봉된 2014년은 시진핑 정권 초기에 해당하며, 표현의 자유가 지금보다 다소 유연하던 시기였다. 특히 문화 대혁명은 덩샤오핑 이후 ‘좌경 오류’로 공식 규정된 만큼, 일정 수준의 반성적 조명은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장예모는 이 점을 정확히 짚어내어, 체제의 정통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민감한 과거사를 영화적으로 풀어냈다.
셋째, 장예모 감독 개인의 위상 역시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이미 『홍등』, 『영웅』 등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작품들을 통해 국제적인 평가를 받은 감독이며,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을 연출하는 등 중국 정부가 신뢰하는 문화예술계의 핵심 인물이었다. 이처럼 체제 내부에서 ‘인정받는’ 위치에 있었기에, 보다 민감한 소재를 다루더라도 당국의 탄압보다는 조심스러운 ‘관리’ 수준에 그쳤다.
중국 당국의 반응은 대체로 절제되고 신중했다. 영화는 정식으로 개봉되었고, 대중적으로도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다만 관영 매체들은 영화 속 문혁 비판보다는 가족애와 기억, 용서라는 인간적 주제에 초점을 맞춰 해석했다. 이는 당국이 영화의 정치적 파급력을 경계하면서도, 완전히 차단하지는 않겠다는 신호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후 중국의 정치 기조가 점점 경직되면서, 『귀래』 같은 작품이 허용될 수 있는 여지는 줄어들고 있다. 역사에 대한 반성조차 ‘사회주의 핵심 가치’에 부합하지 않으면 위험 요소로 간주되는 분위기가 강해졌기 때문이다.
즉, 장이머우는 체제 내부의 허용된 비판 범위와 자신의 영향력을 활용해 『귀래』 같은 영화적 표현을 가능케 했으며, 당국은 이를 예술적 표현으로서 조심스럽게 용인했다. 타고난 예술혼과 함께 시대의 조류에 휩쓸려가지 않고 잘 이용한 것 또한 장이머우 감독의 천재성이랄 수 있을까. 이후 변화된 정치 환경 속에서 장이머우와 같은 감독이 나타나기 어려워지고 있는 것은 관객의 입장에서는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