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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산책, 여여한 하루

모란 보도교 위의 비둘기 한 쌍

by 꿈꾸는 시시포스

눈을 비비며 잠이 덜 깬 얼굴을 모자로 가리고 집 밖으로 나섰다. 다섯 시 무렵이었다. 오랜만의 산책이었다. 한동안 눌러 지낸 시간을 문득 뚫고 나온 것처럼, 아파트 정원의 매미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댔다. 여름은 이미 성성하고, 장마는 몸을 거두고, 폭염은 날을 벼르고 있었으나, 이른 아침의 공기는 의외로 선선했다.

시각쯤이면 눈이 떠지곤 했는데, 지금껏 다시 자리에 누워 뒤척이곤 했었다. 게으름은 항상 나중에 얼굴을 바꿔 후회라는 이름으로 찾아온다. 탄천엔 벌써 러너들이나 라이더들이 제법 많이 눈에 띄었다. 시간이 흐르자 그 수는 승수처럼 늘어났다.

장마에 한껏 부풀었던 탄천의 물은 제 수위를 되찾았고, 징검다리 돌들이 다시 고요하게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탄천 산책로

산책로 바닥엔 초록 유도등이 아직 불을 켠 채였고, 좌우로 풀숲은 밤새 머금은 물기를 털지 못해 축축했다. 오리 한 마리가 물길을 가르며 분주했고, 까치 한 쌍은 사랑놀음이라도 하는지 위아래로 엇갈려 날았다. 천변엔 어릴 적 개구리를 유인하던 강아지풀이 지천이었으나, 정작 개구리는 어디로 자취를 감췄는지 보이지 않았다.

땅버들 사이에서 핀 나리꽃 하나가 홍조를 띤 얼굴로 눈길을 잡아챘다. 금계국 군락은 그 사이사이 샛노란 융단처럼 펼쳐졌고, 모시 보도교를 건너니 익숙한 얼룩 점박이 비둘기 몇 마리가 예전처럼 느릿한 걸음으로 다리 위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모란 보도교를 건너서 공항 담장을 옆에 두고 걷는다. 낯선 보랏빛 꽃이 눈에 밟혀 검색해 보니 ‘솔체꽃’이라 한다. 시처럼 가볍고 기품 있는 이름을 가진 이 꽃은 가슴 아픈 기쁨, 마법, 기적 등의 꽃말을 가졌다고 한다. 고대 유럽에서는 신성한 약초, 악령을 쫓는 식물로 여겨 정화, 치유, 신비한 힘의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슐체꽃/상적천변/능소화와 나리꽃

일출 시각이 되자 탄천 건너편 제방 너머로 태양이 떠올랐다. 첫 빛이 강물 위로 내리 꽂히며 찬란한 기세로 퍼졌다. 철제 가드에 등을 문지르던 여사 한 분이 해사한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나도 잠시 그 자리에 등을 맡겼다. 버드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그 자리는 등 마사지 운동 하기에 딱 좋은 명당처럼 보였다.

멀리 학익진처럼 펼쳐진 청계산의 능선을 바라보며 상적천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라이더들이 무리를 지어 바람처럼 내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상적천으로 흘러드는 시흥천 물길을 따라 비닐하우스 사이 길로 접어들었다. 긴 그림자가 내 발끝을 따라붙었다. 태양이 동행하라는 듯 그림자 하나를 만들어준 것이다. 길 옆에 호박넝쿨은 제 잎을 무성하게 뻗었고, 그 사이로 노란 호박꽃이 얼굴을 내밀었다. 비닐하우스 옆에 기대어 선 능소화는 아침 햇살에 치장을 마치고, 한껏 농염하게 피어 있었다.

시흥천변/샘골 가는 길/ 샘골 고개


여수대로를 건너고, 고속도로 아래 굴다리를 지나 ‘샘골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입구에서 무궁화 몇 송이가 말없이 나를 맞았다. 잔잔한 고갯길을 넘어 닭 울음소리가 새어 나오는 사송동 샘골마을에 이르렀다. 마을은 텃밭을 끼고 산기슭에 다소곳이 안겨 있었다. 다시 한 고개를 넘어, 선사교회 골목을 지나 탄천으로 다시 내려섰다.

느린 걸음이었다. 두어 시간 남짓, 이십 리를 넘는 거리였다.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하루가 여여히 열려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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