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생물에는 '이름'이 있기 마련입니다. 식물이나 동물은 목장에서 사육되는 '소', 화원의 '장미'처럼 뭉뚱그려 보통명사로 불리기도 하지만, 때론 마이클 씨의 반려견 '메리'나 민수가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 '나비'처럼 고유명사 이름을 가진 것도 있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우리 인간은 그냥 '사람'으로 불리지 않고 저마다 고유한 이름을 갖고 있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세상에는 새로운 기능을 가진 물건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기기를 무선으로 연결하는 기능을 가진 '블루투스'라는 기기가 처음 등장했을 때, 문득 그 이름에서 시저를 암살한 정적(政敵) 또는 뽀빠이의 라이벌 '블루투스'가 떠올랐습니다. 사실 영어로 'Bluetooth'와 'Brutus'는 전혀 다른 이름인데 말이죠. 그래서 브루투스와 블루투스에 대해 한 번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고대 로마, 기원전 44년.
위대한 장군이자 정치가였던 줄리우스 시저(Gaius Julius Caesar, BC100 - BC44)는 원로원 회의장에서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습니다.
그 배신자의 이름은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Marcus Junius Brutus, BC85 - BC42).
“Et tu, Brute?”(브루투스, 너마저?)라는 절규와 함께 시저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죠.
수천 년 후, 전혀 다른 무대인 만화영화 속에 또 다른 “브루투스(Brutus)”가 등장합니다. 이번엔 로마 정치가가 아니라, 시금치를 먹는 뽀빠이(Popeye)의 라이벌이자 올리브 오일(Olive Oyl)의 애정 경쟁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이름에 얽힌 흥미로운 사연이 있습니다. 1930년대 초, 만화와 극장용 단편 애니메이션에 처음 등장한 이 악당의 이름은 블루토(Bluto)였습니다. 큰 덩치, 턱수염, 무식할 정도의 힘을 자랑하며 뽀빠이를 괴롭혔죠.
그런데 1960년대, King Features Syndicate가 TV용 ‘Popeye the Sailor’ 시리즈를 새로 제작하면서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당시 제작진은 ‘Bluto’라는 이름이 원래 극장판을 만든 Fleischer Studios의 저작권이라고 오해했고, 문제 소지를 피하려고 이름을 브루투스(Brutus)로 바꿉니다.
하지만 나중에 밝혀진 사실은, Bluto 캐릭터의 권리도 원래 King Features에 있었기 때문에 이름을 바꿀 필요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이후 작품에서는 Bluto와 Brutus가 모두 사용되었고, 팬들 사이에서는 같은 인물인지, 다른 인물인지 헷갈리기도 했죠. 정리하자면, 뽀빠이의 브루투스는 로마의 브루투스와 아무 관계가 없는, 이름 변경 해프닝의 산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20세기말, 또 다른 ‘비슷한 이름’이 세상에 등장했습니다. 바로 무선 통신 기술 블루투스(Bluetooth)입니다. 1996년, 에릭슨·노키아·인텔 등 여러 회사가 무선 데이터 표준을 만들기 위해 모였습니다. 이때 인텔의 엔지니어 짐 카다크(Jim Kardach)가 회의 코드명으로 ‘Bluetooth’를 제안했다고 합니다.
이 이름은 10세기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통합한 왕, 하랄드 블루투스(Harald “Bluetooth” Gormsson)에서 따온 것입니다. 그의 별명 ‘블루투스’는 치아 하나가 파랗게 변색된 데서 나왔다고 전해집니다. 서로 다른 부족을 하나로 묶었던 하랄드 왕처럼, 이 무선 기술도 서로 다른 기기를 연결한다는 의미를 담았죠.
오늘날 블루투스 로고는 북유럽 룬 문자 ᚼ(H)와 ᛒ(B)를 합쳐 만든 디자인입니다.
즉, 로고 속에는 “Harald Bluetooth”의 머리글자 HB가 숨어 있는 셈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사물이나 인물에 대한 표면적인 정보만 가지고 판단하면, 사실과 다른 결론을 내리기 쉽습니다. 인간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로 깊이 알기 전에는 함부로 단정하지 않는 것, 그것이 오해를 막고 관계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아닐까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