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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총성 사이, 안중근의 일주일

김훈의 소설 『하얼빈』

by 꿈꾸는 시시포스

중국 곳곳에는 한국인의 발자취가 켜켜이 쌓여 있다. 멀리 신라의 고승 혜초가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둔황의 막고굴, 당나라 과거에 급제해 벼슬을 지낸 최치원의 양저우,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추앙받은 김교각 스님의 구화산, 해상왕 장보고가 세운 산둥반도의 법화원까지, 한민족의 흔적은 중국 땅 곳곳에 스며 있다. 근대사에 들어서 간도와 만주, 상하이·항저우·충칭 등은 일제에 맞선 독립운동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상하이에 머무는 동안 나는 이런 역사적 장소들을 직접 밟을 수 있었다. 하지만 가슴속 깊이 품었던 또 하나의 장소, 하얼빈은 끝내 가지 못해 아쉬움이 남았었다. 1909년 10월 26일, 전 조선통감이자 일본의 특명전권대사로 러시아와의 외교 협상을 위해 하얼빈역에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를 안중근 의사가 저격한 그 도시. 귀임을 앞둔 2023년 봄, 나는 김훈 작가의 장편소설 『하얼빈』을 손에 넣었다. 2022년 8월에 초간 된 이 작품은 나로 하여금 미처 가지 못한 하얼빈의 공기를 문장으로 마주하게 했다.

소설 『하얼빈』은 암살이라는 행위 자체보다, 그 결단에 이르는 안중근의 내면을 깊이 응시한다. 이야기는 이토 저격 직전 일주일간의 여정을 축으로 펼쳐지지만, 중심에는 ‘천주교 세례명 도마’를 가진 한 신앙인의 고뇌가 놓여 있다. 안중근은 하느님의 뜻 안에서 평범하게 살고자 했다. 포수, 무직, 담배장수로서의 소박한 일상이 그에게도 있었다. 그러나 국난의 현실 속에서 그는 “이토를 지우지 않고서는 조선의 평화가 없다”는 숙명 같은 결론에 다다른다.

이 선택은 분노나 복수심이 아니라, 역사 앞에서 감당해야 한다고 믿은 책임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그는 ‘살인은 악이며, 신앙으로 지울 수 없는 죄’ 임을 자각한다. 신앙과 폭력, 구원과 살인이 한 인간 안에서 부딪히며 교차한다. 김훈은 영웅의 화려한 빛을 걷어내고, 신념과 죄책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 안중근을 조용히 그려낸다. 이 모순은 그를 고통스럽게 하지만, 결국 그는 두 길을 하나의 결단으로 묶는다. 신의 구원과 민족의 독립은 서로 다른 길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길이라고 믿는 것이다.

서울 남산의 안중근 의사 동상과 그의 휘호 비석

김훈의 문장은 절제되고 차갑지만, 짧고 강한 호흡은, 독자를 안중근의 내면 깊숙이 끌고 들어간다. 소설 속 안중근은 하느님께 구원을 바라는 동시에, 민족의 구원자로서 스스로를 세운다. 그에게 종교적 신앙과 독립운동은 모순이 아니라, 하나의 결단으로 귀결되는 두 얼굴이었다.

소설은 암살 준비 과정만이 아니라, 그가 살아온 삶의 조각들을 담아낸다. 가족과 동지들, 만주와 연해주에서의 활동, 신앙인으로서의 기도와 참회, 그리고 군인으로서의 훈련과 결심이 교차한다. 독자는 그가 단지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이 아니라, 흔들리고 고뇌하며 마침내 결단하는 ‘살아 있는 인간’이었음을 느낀다.

추곡리 '작은 안나의 집'에서 조우한 안중근 동상

『하얼빈』은 단순한 역사소설이 아니다. 한 인간이 평범한 삶과 비범한 행동 사이에서, 그리고 신앙과 역사의 요구 사이에서 어떻게 결단에 이르는지를 섬세하게 기록한 내면의 서사다. 종교적 구원과 군인으로서의 사명은 전장의 총성보다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김훈은 영웅의 신화를 걷어내고, 대신 신념과 죄책, 구원과 폭력이 맞부딪히는 순간을 세밀하게 포착한다.

결국 안중근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그의 총성은 망국의 어둠 속에서 민족의 혼을 깨워 일으켰다. “시대가 영웅을 만들고, 영웅이 시대를 만든다”는 그의 말처럼, 그 결단의 그림자는 지금도 우리의 역사 속에 영웅적 서사로 길게 드리워져 있다. 『하얼빈』은 안중근의 일주일을 통해 우리에게 그 불씨가 어떤 고뇌와 신앙, 그리고 결단 속에서 피어났는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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