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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둘러보기

황학산수목원, 신륵사, 파사산성

by 꿈꾸는 시시포스

가을 들어 오랜만에 날씨가 맑은 주말이다. 아내가 여주 황학산수목원을 가보자고 한다. 이 전에 두 번 가보았던 곳이지만, 이 즈음의 수목원 모습이 어떨지 궁금했다.

많은 사람들이 가을빛을 쫓아 수목원을 찾아 주말 한때 힐링을 하고 있다. 매룡지, 강돌정원, 항아리정원, 석정원, 미로원, 전망대, 습지원, 난대식물원 등 산책로 주위에 조성해 놓은 여러 종류의 수목과 갖가지 꽃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카메라에 담지 못한 새소리 물소리를 못내 아쉬워하며, 수목원을 뒤로하고 남한강 건너편에 있는 신륵사로 향했다.

일주문과 불이문을 지나서 신륵사 경내로 들어섰다. 구룡루 극락보전 등 전각들, 남한강변의 강월루와 삼층석탑, 은행나무 고목 등을 오래전 방문 때 각인해 두었던 기억과 대조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신륵사 부근에는 남한강변을 따라 신륵사 관광단지를 조성되어 있다. 많은 탐방객들이 지척에 있는 남한강 출렁다리 위를 걸어서 건너고 있다. 나도 아내와 함께 족히 600여 미터가 넘는 강폭의 남한강 남단까지 건너갔다가 북단으로 되돌아왔다.

주차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원호장군 전승비가 눈에 띄었다. 이곳이 임진왜란 육지 전투 최초의 승리라는 쾌거를 거둔 뜻깊은 장소라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승비 안내문이 아래와 같은 얘기를 들려주었다.

"원호(元豪, 1533~1592) 장군은 원주 원 씨로 여주에서 태어난 조선중기의 무신이다.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머물고 있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그는 분연히 일어나 휘하의 관병과 민병 등 300여 명을 규합하여 신륵사의 팔대숲 일대에서 도강을 기도하는 왜병을 섬멸하고, 구미포(龜尾浦)에 집결한 왜적을 새벽에 기습하여 몰살시키는 등 대승을 거두었다.

이 같은 여강 일대에서의 전투는 무인지경으로 복진하던 왜적을 육전(陸戰)에서 격파한 최초의 승첩이었으며, 국위를 선양하고 실추된 국민의 사기를 전직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 후 그는 아주목사 겸 경기·강원 양 도 방어사로 임명되었고 강원도로 전임하여 금화에서 분전하다 전사하였다. 후에 좌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諡號)는 충장(忠壯) 이다."

관광단지 내에서 주말마다 열린다는 장터에는 길게 늘어선 가판대마다 지역 농산물 등을 진열해 놓았다. 겉껍질을 벗기고 속껍질을 깎아 낸 밤톨 한 봉지와 귀촌을 해서 직접 재배하여 수확했다는 대추 한 곽을 각각 사서 손에 들었다.

차를 몰아 여양로를 따라 파사산성으로 향했다. 남한 강변의 이포보 광장을 사이에 두고 한강과 나란히 동서로 뻗은 여양로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파사성으로 향했다. 시멘트 포장도로가 가파르게 산기슭을 타고 오른다. 도로 옆에는 알밤은 보이지 않고 밤가시가 껍질만 수북이 쌓여 있다.

좌측 능선을 따라 성루와 성문은 오간데 없는 파사성의 남문 앞으로 올랐다. 간간이 뒤돌아볼 때마다 넓혀지던 조망은 눈아래 이포보와 남한강 상류뿐 아니라 어느새 하류까지 파노라마처럼 넓게 펼쳤다. 자연석을 반듯하게 다듬어서 축조한 너비 3~4미터의 성곽이 파사산 능선 가장자리 비탈을 따라 휘돌아 오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 성곽을 따라 산정으로 향했다.

해발 230.4미터 파사산 정상에 이르니 곧 파사산성의 정점이다. 시야가 이천 여주 양평 등 여러 고을까지 멀리 트이며 사방의 산군이 모두 눈 아래로 낮게 깔린다. 안내문이 파사산성에 대해 아래와 같은 내용을 들려준다.

"여주 파사성(婆娑城)은 남한강 동쪽에 있는 해발 230.4m의 파사산 꼭대기에 있는 돌로 쌓은 성으로 국가 사적 제251호이다. 이곳은 한강의 수운 교통과 내륙부의 운송이 모두 교통 될 수 있는 전략적 위치에 있다.

성의 둘레는 1,800m에 최고 높이는 약 6.5m로 규모가 큰 편이다. 성벽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으며 일부 구간은 복원되었다. 성의 동남쪽 능선에는 주요 각루(角樓)로는 치(雉)와 포루(砲樓)가 있다. 또한 성 안에서는 팔각형 건물지와 불탄 문지 등이 확인되었다. 이는 신라, 고려, 조선시대에 걸쳐 파사성이 장기간 군사적 요충지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성은 신라 파사왕(재위 80~112)이 쌓았다고 전하나, 이는 왕명과 성명(城名)의 유사성에 따른 오기일 가능성이 높다. 성내와 성벽 주변에서 신라와 고려, 조선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성벽 축조방식과 문지의 형태 등으로 보아, 파사성은 한강유역 일대로 신라가 세력을 넓혀가던 6세기 중엽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때 유성룡의 건의로 승병장 유엄이 의병과 승병을 이끌고 이곳에 성을 수축하였으며, 외성과 내성, 지휘소, 연못, 무기 제작소 등 여러 시설을 만들었다.

이후 조선시대에도 계속 개축되었다. 하성벽 아래 구간과 성내에서 발견되는 성벽의 흔적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도 방어시설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파사성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매우 아름다워 고려 말의 이색과 조선 중기의 유성룡이 시로 남겼다고 전한다."


<파사성에서 묵으며 금강루에 올라(宿婆娑城 登襟江樓)>_유성룡

나그네가 누각에 올라서니 마음이 넓고

소리 높여 한 번 읊조리니 산 위 바위마저 갈라지네

긴 바람 불어올라 동봉 위에 달이 떠오르고

수만리에 펼쳐진 하늘은 한껏 푸르러라

이 세상에서의 내 삶은 참 아득히 오래되어

동분서주하며 어느덧 백발이 되었고

천지 풍진 속에서 늙고 병들어 가니

우주 이치에 따라 돌아가게 될 몸 텅 빈 탄식만 남네.

客子登臨情浩浩 高歌一聲山石裂

長風吹上東峯月 萬里天容一樣碧

我生於世眞悠悠 北去南來成白髮

風塵天地老病催 宇宙歸來空歎息

파사산성으로 오르기 전 시각이 오후 두 시가 훌쩍 넘어서 있었다. 마침 파사산성 주차장에 닿기 직전 천서리에 막국수 식당이 여럿 눈에 띄어, 그중 여양로에 접해 있는 '천서* 막국수' 식당으로 들어섰다.

천서리는 1978년 평안북도 강계 출신 실향민이 시작한 막국수 집을 기화로 수십 곳으로 늘어났었는데, 지금은 십여 곳의 막국수 집이 대를 이어 전통의 맛을 이어가고 있는 곳이라고 한다.

메밀을 주원료로 하는 강원도 등 타 지역과 달리, 천서리 막국수촌은 메밀과 고구마전분을 배합한 면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면에는 양념장, 다진 편육, 채 썬 오이와 배, 삶은 계란, 깨소금, 김 가루 등 이 올라간다.

주문한 비빔막국수 곱빼기 한 그릇과 만두 한 접시가 뜨거운 육수가 든 주전자와 함께 식탁 위에 올려졌다. 특별한 재료와 전통의 독특한 맛에 젓가락이 분주했지만, 둘이서 실컷 부른 배를 문지르며 남긴 만두 반 접시를 포장했다.

식당을 나서며 "이 천서리막국수집이 앞으로 더 크게 확장을 하여 사업이 잘 됐으면 좋겠다는 나의 마음을 윤희정 사장님께 전합니다."라고 적힌 그 입구에 서 있는 대리석 기념비에 다시 한번 눈길을 주었다. 쌍봉황 문양 아래 "이명박 2011.10.22."이라는 친필 서명이 적힌 것으로 보아, 이포보 준공에 맞춰 열린 ‘4대 강 새 물결 맞이’ 행사에 참석한 이 전 대통령이 이 식당에 들렀던 모양이다.

그는 당시 이포보 행사에서 “큰 일에는 원래 반대가 많다. 역사적인 일에는 반대가 있기 마련”이라는 발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가 한 일이 '큰 일'로, 어떤 의미의 '큰 일'로 기록될지는 여전히 논란의 와중에 있다.

저 파사산성은 지나온 세월처럼 또 다른 천 수백 년을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을 지켜볼 것이다. 우리 인생들이야 서애의 탄식처럼 동분서주하다 보면 어느덧 백발이 되고 늙고 병들어 갈 터. 벗님네들,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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