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블타바, 인생은 강물처럼

스메타나의 교향시 '블타바'

by 꿈꾸는 시시포스


아침 출근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스메타나의 교향시〈나의 조국〉 중 제2악장 ‘블타바’를 듣는다. 그제와 어제에 이어 오늘이 벌써 세 번째다. KBS 라디오의 클래식 프로그램에서 ‘편식의 유혹’이라는 주제로, 일주일 동안 같은 곡을 서로 다른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들려주고 있다. 어제는 체코 필하모닉의 연주였고, 오늘은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버전이다.


같은 곡이지만 해석은 전혀 다르다. 체코 필하모닉의 블타바는 고향의 강을 바라보듯 따뜻하고 정겹다. 현악기의 선율은 부드럽게 흐르고, 목관의 음색에는 들판의 바람과 흙냄새가 배어 있다. 민족적 감정이 잔잔히 번져 나가며, 스메타나의 조국 사랑이 그대로 전해진다. 반면 카라얀의 베를린 필하모닉 연주는 훨씬 장대하고 세련되었다. 강물이 질서 정연하게 흐르며, 마치 대리석 위를 달리는 은빛 물결처럼 정제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체코의 수도 프라하를 관통하는 '블타바'

체코의 국민 음악가이자 보헤미안 민족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베드르지흐 스메타나(1824~1884)는 음악으로 민족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일깨운 인물이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 아래 있던 보헤미아 민중에게 그는 조국의 아름다움과 자유의 열망을 선율로 전했다. 50대 이후 청력을 잃는 불운을 겪었지만, 그는 그 침묵 속에서 오히려 더 깊은 영혼의 소리를 들었다. 그때 탄생한 작품이 바로「나의 조국(Má vlast)」이다.


「나의 조국」은 ‘비셰흐라드’, ‘블타바’, ‘샤르카’, ‘보헤미아의 숲과 들’, ‘타보르’, ‘블라니크’ 등 여섯 곡으로 이루어진 연작 교향시이다. 각각의 악장은 보헤미아의 역사와 전설, 자연, 그리고 민족적 정서를 노래한다. 그중에서도 두 번째 악장 ‘블타바(Vltava, 독일어로 몰다우)’는 체코를 남북으로 가르는 강을 주제로 한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프라하를 품은 이 강의 흐름은 곧 체코인의 삶과 역사, 그리고 영혼을 상징한다.

스메타나는 자신이 작곡한 '블타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 곡은 두 샘물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하나로 합쳐져 숲과 들판을 지나고, 농부의 결혼식, 달빛의 요정들의 춤, 그리고 프라하를 거쳐 장엄히 사라지는 블타바 강의 여정을 표현했다.”

보헤미안 민족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스메타나

곡은 산속의 샘에서 물이 솟는 듯한 가느다란 플루트와 클라리넷의 선율로 시작된다. 그것은 마치 인생의 첫걸음, 순수하고 투명한 어린 시절의 모습 같다. 이어 두 줄기의 물이 하나로 합쳐지며 오케스트라는 점점 풍성해지고, 들판을 스치는 강처럼 리듬은 활기를 띤다. 농부들의 춤곡 같은 부분에서는 청춘의 열정과 생의 환희가 느껴진다.

달빛 아래 흐르는 장면에서는 하프와 현악기가 부드럽게 어우러지며 사랑과 낭만의 시기를 그려낸다.


그러나 인생이 언제나 평온할 수는 없다. 팀파니의 굉음과 금관의 격렬한 선율이 요동치는 강물처럼, 삶의 시련과 고난이 몰려온다. 하지만 강물은 굽이치되 멈추지 않는다. 끝내 프라하의 웅대한 비셰흐라드 성 아래를 지나 엘베강에 합류하며, 멀리 북해로 향하는 그 흐름 속에서 음악은 코랄(chorale; 찬송가)풍의 장중한 찬가로 변모한다. 개인의 삶이 조국과 역사 속에 녹아드는 숭고한 순간이다.

체코 필하모닉

‘블타바’는 단순히 자연을 묘사한 교향시가 아니다. 그것은 인생의 여정이다. 샘의 작은 물줄기에서 시작해서 강으로,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흐름은 인간의 탄생과 성장, 시련과 성취, 그리고 결국 자연으로의 귀의를 상징한다. 고요히 흐르되 멈추지 않고, 굽이치되 꺾이지 않는 — 그것은 인간의 존엄한 여정이다.

그는 세상의 모든 소리를 잃었지만, 오히려 조국의 강이 노래하는 소리를 들었다. 청각의 침묵 속에서도 영혼의 음악을 완성한 그의 삶은 곧 ‘블타바’ 그 자체였다.


20여 년 전, 벨기에에서의 짧은 유학 시절 프라하 패키지 투어에 오른 마지막 날 밤이 문득 떠올랐다. 몰다우 강 유람선 위에서 반복 재생되던 ‘블타바’의 선율에 맞춰 춤추던 노부부들. 그들의 흰 머리칼, 황혼이 물러나고 어둠이 내려앉은 강물, 그리고 '블타바' 바이올린 선율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그 장면은 지금도 내 마음속에서 잔잔히 흐르고 있다. 마치 인생이라는 거대한 블타바가 여전히 나를 품고 흘러가는 것처럼. 내일 아침에는 어느 거장의 '블타바'가 이어질지 기다려진다.

youtu.be/ZWFwtMWFLdc?si=fOYG8_Rg7seG6to9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여주 둘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