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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찾아, 용문사 은행나무

by 꿈꾸는 시시포스


슬며시 찾아온 가을이 어느덧 절정을 향하고 있다. 금세 지나가버릴 계절의 여왕을 그냥 보낼 수 없다는 마음이 들었을까. 아내의 “용문사에 가보자”는 말에 선뜻 맞장구를 치고, 처형 댁까지 동행을 청해 함께 길을 나섰다.

용문사는 몇 차례 다녀온 적 있는 곳이다. 그러나 가을마다 다시 찾게 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수령 1,100년의 거대한 은행나무가 황금빛으로 물드는 그 찰나의 아름다움을 마주하기 위해서 이다. 통일신라의 마지막 왕자 마의태자가 나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향하다 심었다는 전설, 혹은 의상대사의 지팡이가 자라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그 나무는, 천 년 세월을 이겨낸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용문사로 향하는 내 발걸음에는 내심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용문사는 죽정(竹亭) 장잠(張潛, 1497~1552)의 자취가 서린 곳이기 때문이다.


1514년, 열여덟의 나이에 고향 인동을 떠나 조광조 선생을 찾아 상경했던 그는, 이듬해 봄 스승을 따라 용문사에서 학문을 닦았다.

울창한 숲 사이로 바람이 흐르고, 청년 선비들이 스승의 말씀을 새기며 왕도정치와 도학의 이상을 품던 곳. 그 시절의 용문사는 푸른 젊음의 숨결과 이상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정암이 ‘호연지기’를 논하며 인의(仁義)의 근본을 설파할 때, 가슴 벅찼을 소년의 눈빛이 오백 년의 세월을 넘어 반짝이고 있는 듯하다.

당시 서른넷의 젊은 정암 선생은 이미 사마시에 장원으로 이름을 날렸으나, 벼슬보다는 학문에 뜻을 두고 있었다. 그는 김굉필의 문하에서 정몽주 길재 김숙자 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사림의 맥을 잇던 인물이었다. 용문사는 단순한 산사의 공간이 아니라, 사림의 맥을 잇는 배움의 터전이었다.

그 배움의 시간은 길지 못했다. 이듬해 죽정이 모친상을 당해 고향으로 내려가 삼 년 상을 치르는 동안, 세상은 급격히 변하고 있었다. 정암의 개혁이 번개처럼 일어나고 또 순식간에 사라졌던 것이다. 1519년, 중종 14년의 겨울, 남곤과 심정 등 훈구파의 모함으로 정암은 능주로 유배되고 곧 사사(賜死)되었다. 이른바 기묘사화(己卯士禍)였다. 그 피바람 속에서 많은 제자들이 두려움에 정암을 떠나갔지만, 죽정은 백인걸, 성수침과 함께 능주로 달려가 스승이 사약을 받기까지 그를 떠나지 않았다.


죽정은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서 학문에 전념하며 선비의 길을 걸었다. 28세 때는 인동 현감으로 부임한 회재 이언적과 교유했고, 36세에는 안강의 독락당으로 회재를 찾아가기도 했다. 훗날 퇴계 이황이 왜구 포로를 호송하던 길에 죽정의 집에 들렀고, 죽정은 남명 조식의 부친상 조문을 하기도 했다.

그는 34세에 안동 향시에서 2등, 35세에 회시 3등으로 합격했지만, 관직에는 오르지 않았다. 세상에 뜻을 두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다.

49세 때, 스승 정암의 신원 상소를 올리기 위해 다시 서울로 올라갔으나, 마침 또다시 사림이 화를 입은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났다. 이 일로 벼슬의 뜻을 완전히 접은 그는 고향에 죽림정사(竹林精舍)를 짓고, 56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은거하며, 도학의 맥을 이어 후학을 길렀다.

자신을 산에 비유한 “산과 구름 사이가 천리만큼 멀다(雲山千里隔)”는 그의 시구(詩句)에서, 세상의 욕망에서 멀어지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와, 마음의 평화를 추구한 한 선비의 고독을 엿볼 수 있다.

집을 출발한 지 두 시간 남짓 만에 용문사 입구에 다다르니, 주차장 쪽으로 차량 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우리는 도로변의 한 카페에 들러 주인에게 주차 허락을 받은 후 커피를 들고, 용문사까지 2km여를 천천히 걸어서 올랐다. 가을빛이 깊게 스며든 도로변의 단풍은 마치 화폭 위에 물감을 흩뿌린 듯 붉고 노랗게 빛났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단풍에 마음이 흠뻑 물든 듯 즐거운 표정들이다.


일주문을 지나 높은 돌계단 위로 오르자, 사천왕문 너머로 가을빛으로 성장(盛裝)한 은행나무가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천백 년의 세월을 품은 은행나무가 황금빛으로 몸을 감싸고, 가을 햇살에 눈부신 빛을 쏟아내며 서있는 모습, 그 장엄하고도 고운 자태 앞에 나는 그저 소리 없는 탄식을 내뱉을 뿐이다.

대웅전, 지장전, 금동관음보살좌상, 범종각, 산령각 등을 둘러보는 동안에도 시선은 자꾸만 은행나무 쪽으로 향했다. 보는 자리마다 그 형체가 달라지고, 햇살에 닿은 금빛 잎들은 미묘하게 색을 바꾸며 빛났기 때문이다. 순간마다 다른 표정을 짓는 듯한 은행나무의 자태는, 천백 년 세월을 견딘 존재만이 지닐 수 있는 기품이자 신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용문사를 뒤로 하고, 우리는 일주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뒤돌아보니 은행나무는 마의태자와 정암, 죽정, 그리고 이름 모를 사람들이 품었다가 끝내 이루지 못하고 스러진 꿈, 잡히지 않는 신기루처럼 금빛 잎사귀들이 성성한 가지를 높게 펼친 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가을 햇살은 울긋불긋 물든 산 자락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고, 길 위에 떨어져 이리저리 바람에 나뒹구는 단풍은 계절을 재촉하는 듯했다.

점심때가 훌쩍 지났다. 사하촌 식당의 무미한 듯 담박한 음식이 식욕을 당겼다. 허기 때문인지, 무언지 모를 허허로움 때문인지 알 수가 없다.

*참고자료: 조선 영정조 대에 자헌대부 형조판서 오위도총부 도총관 등을 지낸 정범조(丁範祖, 1723~1801) 찬(纂) <죽정집(竹亭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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