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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제비와 미술관

삶의 서사, 전쟁과 평화

by 꿈꾸는 시시포스

크리스마스 휴일, 양평으로 향하는 길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국수리의 맛집으로 소개된 국숫집에서 뜨끈한 부추수제비 한 그릇을 비우고 나니, 몸에 남아 있던 냉기가 온전히 풀리며 나른해졌다.

오후 네 시 반 무렵, 남한강과 나란히 난 경강로를 따라 차를 몰아 식당에서 멀지 않은 양평군립미술관에 도착했다. 주차장 쪽 후문 문을 밀고 들어서자, 움츠렸던 몸이 이내 따뜻한 실내 공기에 반색을 한다. 일층 전시실에는 ‘아버지’, ‘닿을 수 없는 낙원의 향기’ 등의 제목을 단 수묵화와 화사한 색채의 채색화들이 잠시 계절을 잊게 했다.

양평 국수리

피아노가 놓인 홀로 나오니, ‘전쟁과 평화; 삶의 서사’ 제하의 기획전이 열리고 있음을 알리는 대형 포스트가 한쪽 벽면을 채우고 있다. 개관 14주년을 맞은 미술관이 경기문화재단과 협력해서 전쟁이 개인과 사회의 삶에 남긴 흔적을 예술적 언어로 성찰하는 전시회를 마련한 것이라 한다.

이층으로 향하는 경사진 통로 한가운데, 벽에 나란히 걸린 두 점의 그림 앞에서 발걸음이 저절로 느려졌다. 해설사 한 분이 그림의 의미를 설명해 주겠다고 다가왔다. 무언가를 흰 천으로 질끈 싸서 줄지어 세워 둔 광경과, 캔버스 가득 핏빛 얼룩만이 번져 있는 회화_흰 포대기 속에 싸인 것이 주검이라는 사실과, 붉은 물감이 어린아이 한 명의 온몸에서 흘러나올 수 있는 피의 양을 가늠해 그린 것이라는 설명이 직감적으로 다가왔다.

저 피가 어느 아이의 것일지, 어떤 순간의 것이었을지 상상은 곧바로 우크라이나의 도심, 가자지구의 어느 골목, 그리고 이 땅을 붉게 물들였던 전쟁의 기억으로 옮겨 갔다.

두 그림이 걸린 곳이 통로라는 장소성도 인상적이다. 관람을 위해 반드시 지나야 하는 길목에 죽음의 이미지가 놓여 있다는 것은, 전쟁이 결코 전시장 안에서만 머무르는 비현실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메시지처럼 다가온다. 오늘도 세계 여러 곳에서 누군가는 저 흰 포대기에 싸여 옮겨지고 있을 것이다.

양평군립미술관

해설사는 ‘전쟁과 마주하다’, ‘흔적을 탐색하다’, ‘평화를 만들어가다’, ‘일상을 살아가다’ 등 네 개의 섹션으로 구성된 이 전시회는 노순택, 권하윤, 김동욱, 육근병, 임철민, 조소희, 전병삼, 하태범 등 국내외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작가 52명이 참여해 회화, 조각, 미디어, 설치 등 총 10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고 했다.

이층 전시관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전관을 사용한 넉넉한 공간 속에서 DMZ,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민간인과 아동의 희생 등을 다룬 작품 등이 널찍이 배치되어 있다. 작품과 작품 사이의 여유로운 공간은 한 작품에 집중하여 그 의미를 곱씹어 볼 수 있는 배려처럼 느껴졌다.

붉은색 톤의 <평화 누리길> 작품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붉은 산책로와 철조망, 그 앞을 서성이거나 걸어가는 평범한 옷차림의 일상 속 사람들이지만, 그들 뒤로 전쟁이 잠시 멈춘 휴전의 경계선인 DMZ가 펼쳐져 있고, 철조망 옆 바닥은 일회용 컵과 음료수 병들이 어수선하게 에 흩어져 있다. 안락한 일상의 산책길과 눈앞의 철책 사이의 간극만큼이나, 한반도 분단 현실과 남한 사회의 무관심 사이의 간격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과일 광주리를 머리에 인 여인과 두 팔을 쳐든 채 기쁜 표정으로 DMZ 철조망을 뛰어넘는 그림에는 "통일이다 고향가자 실향민 이동표 2013"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신제암 作 <20세기의 추억>
‘전쟁과 평화; 삶의 서사’ 기획전 전시작

다른 쪽 벽면을 가득 메운 대형 회화는 검은 실루엣과 일그러진 얼굴, 파편화된 신체가 서로 뒤엉킨 장면을 담고 있다. 어둠을 가르며 비명을 내지르는 형상은 자연스럽게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떠올리게 한다. 명확한 서사 대신 파편적 이미지와 상징이 난무하는 화면 속에서, 관객은 어느 전쟁, 어느 나라의 어느 순간인지조차 식별할 수 없는 ‘익명의 폭력’과 마주하게 된다.

전시 공간을 연결하는 통로에는 여러 조각품들이 놓여 있다. 그중 하나는 차갑게 번들거리는 금속으로 만든 조각품이다. 총을 겨누고 서 있는 인물의 이 조각은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인간을 둘러싼 장치로서의 무기와 폭력의 구조를 강조한다. 총구가 향하는 방향은 관람객을 향해 열려 있어, 작품 앞에 서는 순간 어느새 자신이 조준선의 연장선상에 서 있다는 불편한 자각을 하게 된다. 이러한 배치는 일면 전쟁터와 관람객 사이의 안전한 거리를 무너뜨리는 의도적 장치이자, 방관자가 아닌 당사자의 시각으로 전쟁의 문제의식을 체감하게 한다.

하태범 作 <Syria 1>
이흥덕 作 <DMZ 심판>
육근병 作 <가이아의 게르니카>
신제남 作 <변검>
‘전쟁과 평화; 삶의 서사’ 기획전 전시작

전시장 한편에는 흑백의 고층 아파트 이미지 그림 몇 점이 나란히 걸려있다. 얼핏 보면 사진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조각난 벽면과 구멍 투성이의 외벽, 덜어낸 듯한 건물의 일부가 현실과 비현실 사이를 오가는 느낌을 준다. 총탄 자국과 폭격의 흔적이 남은 건물은 우크라이나, 가자지구, 시리아 등 전 세계 어느 폐허의 도시를 떠올리게 하는 전흔의 풍경이다. 이 건축적 폐허의 이미지 앞에서는 전쟁이 추상적인 이념이나 국가 간의 갈등이 아니라, 삶의 터전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사건임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창문마다 비어 있는 사각형은 떠나버린 사람들의 흔적을, 부서진 발코니와 휘어진 철근은 돌아올 수 없는 일상의 파편을 지시하는 듯하다. 관람객은 자신도 모르게 건물 내부에 있었을 누군가의 삶을 상상하게 되고, 그 상상은 곧 ‘우리 동네’의 아파트와 골목으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관람 내내 ‘지금 여기’의 일상과 ‘저기 어딘가’의 전장이 겹쳐 보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양평은 6·25 전쟁 당시 지평리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1951년 중공군의 2월 공세를 미 제23연대와 프랑스대대가 지평리 일대에서 격퇴한 지평리전투는 미군이 중공군과 싸워서 얻은 최초의 전술적인 성공으로, 유엔군의 반격 발판의 전환점이 된 전투로 평가되고 있다.

중앙선 지평역 부근에는 '지평의병 지평리 전투 기념관'이 있다고 하니, 기회를 만들어서 찾아보아야겠다. 관람을 마치고 미술관 밖으로 나오니, 밖은 어느덧 겨울 어둠의 커튼을 내리고 있었다.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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