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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한 추위 속 인간 군상

브뤼겔의 「눈 속의 사냥꾼들」

by 꿈꾸는 시시포스

일 년 중 눈이 가장 많이 내린다는 절기인 대설이다. 며칠 전 밤새 내린 첫눈이 온천지를 온통 순백의 세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처럼 눈 쌓인 겨울날이면 떠오르는 명화 한 편이 있다.

플랑드르 르네상스 회화를 대표하는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인 피터 브뤼겔(Pieter Bruegel the Elder, 1525~1530년경 출생 1569년 사망)이 1565년에 그린 「눈 속의 사냥꾼들」이 그것이다.

오래전 브뤼셀 왕립미술관에서 자크루이 다비드, 크라나흐, 루벤스, 얀 반 에이크 등 거장들의 작품과 함께 접했던 이 그림은 아직도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브뤼겔의 「눈 속의 사냥꾼들」

브뤼겔의 「눈 속의 사냥꾼들」은 농촌의 계절 풍경을 주제로 한 '사계 연작' 6편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 12월과 1월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사람들이 생업을 이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눈 덮인 산악 풍경과 얼어붙은 호수, 그리고 그 위에서 각자 할 일을 이어가는 사람들 모습은, 자연의 거대함 앞에서 더욱 작아지는 인간의 존재를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끈질기고 강인한 삶의 활력을 잘 담아내고 있다.​

브뤼겔은 당시 종교적·신화적 장면의 배경으로 취급되던 풍경을 그 자체의 독립적 주제로 격상시키고, 종교적 서사 대신에 농민 생활의 일상과 자연을 사실적으로 기록했다. 또한 그의 겨울 연작은 16세기 중반 혹독한 겨울이 이어지던 소빙하기의 유럽의 풍경을 잘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작품들은 이후 북유럽 풍경화의 황금기를 여는 기반이 되었고. 르네상스 시대 농민의 삶과 기후 환경 등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 귀중한 역사적 사회사적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문득 김홍도의 풍속화들이 떠올랐다. 김홍도는 「타작」에서 허리를 잔뜩 굽히거나, 몸을 비틀며 일하는 농부들의 동작을 약간 과장된 선과 리듬감 있는 구도로 묘사했다. 그들의 과장된 몸짓과 익살스러운 표정은 노동의 고단함 속에 배어 있는 활력과 공동체적 유대감을 유머러스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들의 모습은 장죽을 물고 비스듬히 누워있는 양반의 모습과 대비되는데, 이는 당시 신분에 따라 사회적 역할이 갈리는 계급사회의 일면을 극명히 보여주고 있다.

김홍도의 「타작」
브뤼겔의 「눈 속의 사냥꾼들」_부분
브뤼겔의 「눈 속의 사냥꾼들」_부분

반면, 브뤼겔의 「눈 속의 사냥꾼들」은 광활한 겨울 풍경을 펼쳐 보인다. 화면 왼쪽 언덕의 사냥꾼들과 개들은 사냥에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지친 모습으로 눈 덮인 비탈길을 천천히 내려오고 있다.

멀리 얼어붙은 연못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 연기 오르는 굴뚝, 산자락을 메운 설경이 모두 합쳐져, ‘노동의 하루’가 거대한 자연과 계절의 일부로 흡수되는 느낌을 준다. 김홍도가 서민들의 일상을 해학과 따뜻한 시선으로 포착했듯, 브뤼겔 역시 농부와 사냥꾼, 아이들과 장터 사람들을 즐겨 그리며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회화의 전면에 세웠다.

브뤼겔의 「눈 속의 사냥꾼들」과 첫 대면 이후 십여 년이 지난 어느 해 3월, 비엔나 미술사박물관에서 그 그림과 다시 조우했다. 이때 이 작품을 포함하여 브뤼셀 왕립미술관에 걸린 브뤼겔의 그림들 상당수가 복제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왕립미술관에서 느꼈던 그때의 첫 감동은 지금껏 조금의 변함이 없다. 혹독한 추위에 굴하지 않고 노동을 하고 유희하며, 각자의 삶을 헤쳐 가는 군상들의 모습을 생생히 담아낸 파노라마가 절로 감동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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