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발이 흩날리는 주말 오전,「빛의 화가 베르메르의 비밀: 고요 속의 빛」 제하의 기획전이 열리고 있는 성남큐브미술관으로 향했다. 이번 전시는 베르메르 사후 350주년을 기념해 마련된 자리로, 현존하는 것으로 알려진 그의 작품 36점 전부를 한 공간에서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특별했다.
전시 작품들은 원본이 아닌 레플리카(Replica)이다. 그러나 동일한 크기와 재질, 같은 드로잉 기법과 안료 연구를 바탕으로 제작된 이 레플리카들은 단순한 복제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유럽의 여러 국립미술관들이 원작 보존을 위해 전시용 레플리카를 사용하는 것처럼, 이 전시 또한 ‘원본의 부재’가 아니라 ‘원본에 접근하는 또 다른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런던 내셔널 갤러리와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서 마주했던 <우유를 따르는 여인>, <델프트의 집 풍경>, <버지널에 앉아 있는 여인> 등을 비롯해서, 네덜란드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 미국 일본 등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그의 작품들을 한자리에서 모두 만나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설렜다.
티켓팅을 하고 전시실로 들어서자, 먼저 베르메르가 태어나고 작품활동을 한 17세기 네덜란드의 전형적인 소도시 델프트와 당시의 화풍에 대한 소개 자료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1997년 초겨울 홀로 델프트를 찾았을 때의 기억이 스쳐갔다.
그 옆 공간에는 "17세기 델프트, 빛을 연구한 도시_지도는 세계를 넓혔고, 광학은 시선을 넓혔습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당시 화가들의 탐구정신을 상징하는 카메라 옵스큐라에 대한 설명이 눈에 띈다. 베르메르의 그림이 단지 고요하고 아름다운 실내 풍경의 반복이 아니라, 빛의 경계, 부드러운 흐림 효과, 공간의 깊이에 대한 더 정확하고 사실적인 관찰 등 치열한 실험의 결과였음을 이 장치는 암시하고 있다.
이어서 베르메르의 회화 세계가 하나의 서사처럼 펼쳐지기 시작했는데, 전시는 작풍의 변화에 따른 시기별 세 개의 섹션과 '베르메르 미스터리' 등 네 개의 세션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첫 번째 섹션 ‘빛의 탄생_초기 베르메르, 1653-1657’은 베르메르 회화의 출발점을 보여준다. <디아나와 님프들>,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 <성 프락세디스>와 같은 초기작들은 강한 명암 대비와 종교적 서사를 담고 있지만, 이미 인물의 감정을 절제하고 빛을 부드럽게 다루려는 흔적이 엿보인다. 이어지는 <뚜쟁이>와 <잠든 하녀>를 거치며 그는 신화와 종교에서 일상의 실내로 관심의 초점을 이동시킨다. 이 변화는 단순한 소재 전환이 아니라, ‘무엇을 그릴 것인가’에서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로의 근본적 이동이었다.
두 번째 섹션 ‘일상의 침묵, 1658-1663’에 이르러 베르메르는 완전히 다른 화가가 된다. 화폭에서 종교와 신화적 사건은 사라지고 시간과 동작은 멈춘다. <델프트의 집 풍경>, <신사와 술을 마시는 여인>, <포도주 잔을 든 여인> 속 인물들은 무언의 상태로 빛 속에 놓여 있다. 왼쪽 창으로 들어오는 자연광, 중간 톤으로 정교하게 조율된 색면, 거의 움직이지 않는 공기감은 화면 전체를 하나의 ‘침묵’으로 만든다. 이 시기 베르메르는 더 이상 이야기를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관람자가 그 장면 안에 머물게 한다.
세 번째 섹션 ‘빛의 조화, 1664-1675’는 베르메르 예술의 절정이다. <저울을 든 여인>에서 빛은 도덕적 판단이나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내면의 균형’을 드러낸다. <편지를 쓰는 여인>, <연애편지>, <레이스 뜨는 여인> 속 작은 손짓과 시선에는 작중 인물의 집중과 사유가 그대로 담겨 있다.
특히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앞에서는 누구나 발걸음을 멈춘다. 이 작품은 17세기 네덜란드 플랑드르 회화에서 발전한 인물 표현 형식으로, 특정 인물의 초상화가 아니라 ‘표정 시선 빛 표정의 상태 등을 연구하기 위한 '트로니(Tronie)' 형식의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생동감이 넘치는 여인의 눈빛과 영롱한 빛을 머금고 있는 진주 귀걸이 등이 사실감을 극대화시킨다. 이 그림이 ‘북유럽의 모나리자’로 불리는 이유는 신비로운 미소 대신 여인의 '침묵 속 응시'가 무한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편, <천문학자>와 <지리학자>는 베르메르가 살았던 17세기 네덜란드의 지적 풍경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무역과 과학, 관찰과 측정이 일상이던 시대, 빛은 이제 신의 은총이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도구가 된다. 베르메르는 회화를 통해 그 시대의 사유 방식을 조용히 기록하고 있다.
마지막 섹션 ‘베르메르 미스터리’는 덧칠을 걷어내고 온전한 모습을 되찾은 <열린 창가에서 편지를 읽는 여인>, 도난당했다가 되찾은 <연애편지>와 <편지를 쓰는 여인과 하녀>, 나치에 빼앗겼던 <천문학자>와 <회화의 기술>, 도난되어 지금까지 되찾지 못한 <음악회>, 한 반 메헤런(Han van meegeren)의 위작 <Woman Reading> 논란 등을 소개한다.
짧은 생애에 적은 수의 작품을 남기고 간 베르메르는 생전에 큰 명성을 누리지 못했다고 한다. 사후 오랫동안 잊혀 오다가 19세기 후반 재발견되며 ‘델프트의 스핑크스’라는 별칭을 얻으며 각광받게 된 것이다.
베르메르는 화가이기 이전에, 빛을 연구한 사색가였고, 그림은 그 탐구의 기록이었다. 그래서 이 전시는 단순한 명화 감상이 아니라, 한 인간이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자 했는가를 따라가는 지적 여정처럼 느껴졌다. 조용한 방 안으로 스며드는 빛 한 줄기 속에 담긴 수많은 실험과 실패, 그리고 끝내 도달한 투명한 진실. 350년 전 베르메르의 혼이 담긴 작품들을 마주하고 나니, 새삼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히포크라테스의 말을 되뇌게 된다.
전시장을 나서는 순간, 베르메르의 그림들이 우리들 자신은 무엇을 추구하고, 그 추구하는 바에 도달하기 위해 얼마나 치열했던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