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시립월전미술관 관람
우수가 지나서인지 공기에 포근한 봄의 기척이 묻어있다. 햇살은 부드러워졌고, 바람은 더 이상 옷깃을 여미게 하지 않는다. 계절의 변화가 몸보다 마음에 먼저 와닿는 날, 아내와 함께 뒤늦은 성묘를 하고 이천 쪽으로 나들이를 나섰다. 시립월전미술관을 둘러볼 요량인데 먼저 출출한 배부터 채우기로 했다.
이천은 쌀밥으로 이름난 도시로 인근 사람들의 미각을 끌어당긴다. 처음 들른 식당은 주차장 진입조차 어려울 만큼 붐볐고, 한 시간 이상 대기를 해야 한다는 말에 발길을 돌렸다. 조금 떨어진 다른 식당도 많은 식탁이 손님으로 거의 빈틈없이 들어차 있다.
옆자리에서는 중년의 여성들이 둘러앉아 이번 설 명절 음식 장만을 둘러싼 동서나 시댁 식구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쌓였던 스트레스를 털어낸다. 낮은 웃음과 푸념이 뒤섞인 수다는 잠시도 멈출 줄 모르고, 그 소란마저도 명절 이후에야 허락된 일상의 숨 고르기처럼 느껴진다. 기다림 끝에 나온 볼락구이와 삼치구이, 그리고 돌솥밥은 충분히 그 시간을 보상해 주었다. 윤기 도는 쌀밥과 담백한 생선구이가 금세 포만감을 안겨준다.
점심을 마친 뒤 설봉공원으로 향했다. 공원 입구부터 차량이 빼곡히 들어선 모습에서 이곳이 이천 시민들이 즐겨 찾는 일상적 휴식처임을 짐작할 수 있다. 공원 안쪽에 자리한 이천시립월전미술관은 이러한 생활의 풍경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 이 미술관은 한국 인문화의 마지막 거장으로 알려진 월전(月田) 장우성(張遇聖, 1912-2005) 화백의 예술 세계를 기리고 연구·전시하기 위해 설립된 미술관이다.
미술관 안으로 들어서서 1층에서 매표를 마치고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오르자, 복도 전시대 위에 놓인 청대(淸代)의 대형 청동향로와 동종, 그리고 장우성의 그림이 담긴 대형 백자 호가 관람객을 맞이한다. 생활과 예술, 시간과 공간이 한 자리에 겹쳐지는 첫 장면이다.
이번 전시의 중심은 ‘말띠 그림전’이다. 제3전시실에서는 말이라는 존재가 지닌 상징성과 시대적 해석을 폭넓게 펼쳐 보인다. 김은형의 <장과로(張果老)와 타임머신>은 한지에 수묵으로 그려졌는데, 전통 수묵화의 여백과 호흡보다는 과잉에 가까운 밀도의 선들이 화면을 지배한다. 나귀를 타고 책을 읽는 인물은 시간과 지식, 이동의 은유로 읽힌다. 이 인물 주위로 얽혀 있는 여러 얼굴과 형상들은 개별적 서사를 갖기보다 기억의 파편처럼 중첩되며, 하나의 중심 서사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는 과거와 현재, 의식과 무의식이 동시에 작동하는 ‘사유의 장면’을 시각화한 것으로 보인다.
<뇌행성 정류장>에서도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노쇠한 나귀는 노동과 이동, 그리고 짐을 짊어진 존재로서 인간의 또 다른 초상이다. 숫자가 적힌 맷돌 같은 형체, 파도 문양, 괴생명체를 태운 가마꾼, 붓꽂이 등은 문명과 자연, 창작 행위와 육체적 노동이 뒤섞인 세계를 형성한다. 김은형의 말(혹은 나귀)은 속도나 힘의 상징이 아니라, 무거운 사유를 견디는 매개체로 기능한다.
임만혁의 작품에서 말은 보다 서정적이고 관계적인 존재로 변모한다. 한지에 목탄으로 그린 <가족 이야기 25-1>은 말, 닭, 개, 그리고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의 형체를 침범하듯 겹쳐져 있다. 이는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개별적 존재들의 합이 아니라, 서로의 삶이 스며든 유기적 구조임을 암시한다. <말과 가족 21-3>에서는 원색의 채색이 더해지며 화면에 생동감이 깃든다. 말등에 아이를 태운 부부의 모습은 보호와 신뢰, 그리고 다음 세대로의 이행을 상징한다.
<말과 가족 23-1>에서 말 두 필과 강아지, 네 명의 가족은 직선과 곡선이 교차하는 추상적 구성 속에 놓인다. 특히 사람과 동물의 눈이 모두 동그랗게 닮아 있다는 점은, 반려동물이 더 이상 주변적 존재가 아니라 가족의 정서적 중심에 있음을 은근히 드러낸다. <말과 가족 21-4>에서도 백마와 어린 남매를 감싸 안은 부모의 팔은 보호의 제스처이자,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한다. 임만혁에게 말은 자연과 인간, 가족과 세계를 연결하는 매개자다.
김태형의 <놀이가 끝나고 난 뒤 No.2>는 현대 시각문화의 파편성을 극대화한 화면이다. 공룡, 디지몬 캐릭터, 각종 동물, 사람의 얼굴과 말은 서로의 경계를 상실한 채 얼룩무늬와 꽃문양 속에 녹아든다. 이 작품에서 말은 더 이상 특정 상징에 고정되지 않고, 이미지 소비 사회 속에서 다른 캐릭터들과 동등한 위치에 놓인다. <달리는 아빠>에서는 서사가 보다 명확해진다. 파도 위를 달리는 말등의 인디언과 총잡이풍 인물, 장난감 말 위의 아톰은 현실과 상상, 세대 간 기억이 교차하는 장면이다. 여러 마리 토끼들이 같은 방향으로 달리는 모습은 유년의 환상과 속도감을 더하며, 말은 놀이와 기억을 실어 나르는 탈것이 된다.
제4전시실의 말 그림들은 한층 고요하고 상징적이다. 김혜영의 <어디에도 닿지 않는 문>은 유리창 너머의 백마를 통해 도달 불가능한 공간과 욕망을 암시하고, <혼잣, 말>에서는 커튼이라는 경계 너머로 말의 일부만을 드러내며 존재의 단절과 고독을 표현한다.
화가 송형노는 연작 두 점에서, 눈부신 갈퀴와 꼬리를 지닌 백마가 두 앞발을 치켜든 순간을 포착한다. 이 자세는 단순한 동작의 재현이 아니라, 중력과 현실의 질서로부터 벗어나려는 긴장과 욕망을 응축한 상징적 몸짓으로 읽힌다. 화면 속 말은 질주 이전의 에너지, 혹은 도약 직전의 정지된 시간 속에 머물며,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스스로를 들어 올리는 존재로 형상화된다. 송형노에게 백마는 힘과 속도의 상징을 넘어, 이상과 환상의 차원으로 상승하려는 내적 충동을 시각화한 매개체라 할 수 있다.
김영현의 <잠자는 말>은 초원에 몸을 누이고 있는 말의 휴식을 통해 존재의 평온한 순간을 포착한다. <숨바꼭질>에서 광목 위에 채색으로 세 필 말의 뒷모습을 제시함으로써, 대상의 얼굴을 의도적으로 비워낸 채 존재의 기척과 거리감을 환기한다. 관람자는 말과 마주하기보다 그들이 떠난 방향과 여운을 바라보게 되며, 이는 부재와 기다림, 혹은 놀이와 은폐의 감정을 은근히 불러일으킨다. 반면 <붉은말>에서는 강렬하고 응축된 붉은 색조로 말의 두상을 정면에 가깝게 부각하며, 앞선 작품의 절제와는 대조적으로 생명력과 정념, 내면의 에너지를 폭발시키듯 드러낸다. 이 두 작업은 시선의 회피와 응시, 거리와 밀착이라는 상반된 전략을 통해 말이라는 동일한 대상을 서로 다른 정서적 스펙트럼 위에 배치한다.
이처럼 각 작가의 말은 동일한 주제 아래 놓이면서도, 노동과 사유, 가족과 관계, 놀이와 기억, 고요와 꿈이라는 서로 다른 층위를 형성한다. 이번 전시는 말이라는 오래된 이미지가 여전히 동시대 미술에서 유효한 은유임을, 그리고 그 의미가 끊임없이 갱신되고 있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제5전시실 '월전화록(月田畵錄)' 주제관은 전시의 무게 중심이다. 월전 장우성 화백의 연표, 그가 국가로부터 받은 훈장과 유품, 그의 청동 손 모형 등과 함께 열서너 점의 서화 작품들은 한 작가의 삶과 시대를 증언한다. 그의 2000년 작 <미소>를 비롯해 <개싸움>, <수고무강첩>, <개들>, <황사>, <아슬아슬>, <유인원도–우리 속엔 원숭이, 우리 밖엔 사람>, <간중어(澗中魚)> 그리고 2001년에 제작된 <광우병에 걸린 황소>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들은 인간과 사회를 향한 날 선 시선을 일관되게 품고 있다.
특히 <광우병에 걸린 황소>는 훗날 현실이 된 2008년 광우병 파동을 떠올리게 하며, 시대의 불안을 미리 감지한 예술가의 예민한 촉수를 실감하게 한다. <낙오된 거위>, <단군일 백오십 대 손>, <황소개구리> 등의 작품 역시 웃음을 가장한 풍자를 통해 사회의 모순과 인간 군상의 이면을 드러낸다. 이러한 작업들은 그의 예술 세계에서 중요한 축을 이루는 ‘풍자화’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그의 풍자는 조롱이나 냉소에 머무르지 않고, 공감과 연민을 바탕으로 한 인간적 시선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더욱 깊은 울림을 남긴다.
아래층 전시실로 내려오면 다시 말들이 관람객을 맞는다. 장우성의 <말>, 이석구의 <광마>, <주마> 등은 한국 근현대 회화에서 말이 어떻게 표현되어 왔는지를 보여준다.
권지은의 <불어오는 바람소리 #1, #2> 연작에는 완만한 구릉을 연상시키는 얼룩무늬의 군집이 반복된다. 이 무정형의 패턴들은 말의 등선이나 군집의 움직임을 떠올리게 하며, 부재를 통해 오히려 존재를 환기한다. <유령나무> 역시 유사한 맥락에 놓인다. 앙상한 가지의 나무 한 그루가 화면 중앙에 서 있는데, 그 아래 펼쳐진 완만한 하늘은 마치 말들의 등이 이어진 듯한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두 개의 달 – 침묵의 시간>(2024), <몽환–기다림의 다른 이름>(2019)에서도 얼룩과 줄무늬는 집요하게 반복되며, 이는 형상을 지워낸 자리에서 감각과 기억이 응집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허진의 <유목동물+인간–문명>에서는 결박되고 상처 입은 말의 형상이 인간의 형상, 공구, 바퀴, 가방 등 문명의 기호들과 뒤엉킨 채 수많은 점들로 채워진 화면 위에 놓인다. 이는 문명 속에서 소모되고 억압되는 생명과 노동의 은유로 읽힌다. ‘강진의 추억’이라는 부제가 붙은 <유목동물+인간 2010-7>(2010)에서는 말의 형상이 무위사 선각대사 부도비, 통도사 입석상, 무위사 수월관음도, 병영홍교 등의 이미지와 함께 등장하며, 개인적 기억과 역사, 종교적 상징이 교차하는 복합적 공간을 형성한다. 한자 탁본 위에 검은 말 한 필씩을 그린 <유목동물 2011-4, -6> 연작은 한지 수묵채색화로, 인간 문명과 오랜 시간 공존해 온 말의 존재를 상징적으로 환기한다.
이민주의 <공(空)의 공명(共鳴)>은 305 ×99cm에 이르는 대작으로, 옹달샘과 계곡, 폭포수의 흐름 속에 네 필의 말이 어우러진 장면을 담고 있다. 자연의 순환과 생명의 리듬 속에서 말은 풍경의 일부로 스며든다. <그대와>에서는 얼룩말을 연상시키는 기법으로, 말등에 무릎을 꿇고 앉은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며, 동행과 의탁의 관계를 조용히 드러낸다.
한편 정종해의 <절규>는 추상에 가까운 형상으로 구성되어, 그것이 말인지 혹은 전혀 다른 존재인지 쉽게 단정할 수 없다. 말로 읽히는 형상은 어쩌면 작가 자신의 내면이거나, 혹은 이를 바라보는 관람자의 해석이 덧입혀진 결과일지도 모른다. 출구에 이르러 마주하게 되는 그의 대작 <질주>에서는, 흐릿하지만 분명하게 세 마리의 말이 한데 엉켜 앞으로 내달리는 모습이 드러난다. 전시의 끝자락에서 다시 등장한 이 질주의 장면은, 앞서 비워지고 해체되었던 말의 이미지가 다시금 운동성과 생명력을 회복하며 관람의 여운을 강하게 각인시킨다.
당초 미술관을 찾으며 <충무공 이순신 영정>(현충사 소장), <백두산 천지도>(국회의사당), <절규>(국립현대미술관), <청춘일기>(삼성미술관 리움), <새안(塞雁)>(영국 대영박물관), <홍매>(프랑스 문화성), <회고>(독일 쾰른 시립박물관), <심청도>(일본 후지미술관), <청년도>(고려대학교 박물관), <금강산도>(서강대학교 박물관) 등 월전의 대표작들을 모사본으로나마 불 수 있으리란 기대를 접어야 했기에 마음속에 이는 아쉬움이 크다. 1층 복도에서 마주한 장우성의 <성모자상> 등 몇 점의 작품으로 그 아쉬움을 달랬다.
일상의 공원과 사유의 공간인 미술관이 맞닿아 있는 이곳에서,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와 감정, 문명을 함께 짊어진 존재로 그려지고 있는 말을 재발견하는 시간이었다. 미술관을 나서니 설봉공원은 완연한 봄날이다. 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