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지은 이름
환갑을 넘기고 진갑의 고개를 넘기까지 세월의 굽이를 무심히 흘러왔다. 새로운 갑자를 다시 시작하며 내 삶의 자취를 돌아보고 스스로에게 선물 하나를 하고 싶었다. 욕망을 덜어내야 할 나이에 세속의 선물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대신 마음속에 새겨 두는 조용한 이름 하나, 삶의 방향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표징으로서의 ‘호(號)’를 짓기로 했다.
예전 산행에 빠졌던 때 관향의 ‘仁’ 자에 ‘山’을 더한 ‘仁山’을 산행 후기의 필명으로 써왔다. 산을 좋아하는 성향과 뿌리를 잊지 않으려는 마음을 함께 담으려 한 것인데, 지금 보니 스스로를 좁은 울타리 안에 가두는 편협함이 엿보이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군자는 덕을 생각하고 소인은 고향을 생각한다(君子懷德 小人懷土)”는 논어 구절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호의 기원은 중국 춘추전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송 시기에 점차 보급되어 원명청 시기에 절정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러한 풍조가 조선의 선비들 사이에 유입되어 자신의 삶의 태도나 정체성 또는 자신이 추구하는 사상이나 학문 방향 등을 호(號), 당호(堂號), 별호(別號) 등에 담아 불렀던 것이다. 태어날 때 누군가가 지어준 이름인 본명 외에, 성인이 된 후 예의상 부르는 이름인 자(字)과 함께 성년이 된 후 스스로 호(號)를 지어 별칭으로 삼은 것이다. 추사(秋史) 또는 완당(阮堂)이라는 호로 잘 알려진 김정희의 경우 호 당호 서화낙관 등 수많은 호를 지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리저리 고심 끝에, 보다 넓고 유연한 마음으로 세상을 마주하고 싶은 뜻을 담아 새로 정한 이름이 ‘若川’이다. 흐르되 다투지 않고, 깊되 드러내지 않는(流而不競, 深而不顯) 물을 닮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서. 크든 작든 모든 물줄기는 스스로 낮은 곳을 향해 흐른다. 흐르는 물(川)은 연못(淵)과는 달리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길을 내고, 낮은 곳을 마다하지 않으며, 막히면 돌아가고, 억지로 앞서려 하지 않으면서도 끝내 바다를 향해 흘러간다.
약천(若川), 그 이름에 산처럼 높이 서 있기를 구하지 않고 낮게 흐르며 세상을 품는 강처럼, 자신을 완고하게 세우기보다 부드럽게 낮추는 자세를 담고자 했다. 흐르는 물처럼 살고자 하는 소망을 담은 이 이름이야말로 여생(餘生)에 걸맞은 검소하면서도 과분한 선물이 아니겠는가.
오늘은 마침 정월대보름이다. 동네 공원에서 개기월식이 진행 중인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36년 만의 정월대보름 ‘블러드문’ 쇼를 펼쳐 보이는 우주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지구의 그림자에 가려 붉게 변한 달이 밤하늘에 찍어 놓은 낙관 마냥 선명하다. 숨었던 별들도 총총 모습을 드러낸 밤이다.
26-03-03 若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