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박물관 탐방

by 꿈꾸는 시시포스

입춘을 앞두고 일주일 내내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산책 겸 집을 나서 경기도박물관으로 향했다. 일요일의 경부고속도로는 한산했다.

신갈 인터체인지로 빠져나온 버스가 신갈천 천변 정거장에 정차했다. 600여 미터 거리의 박물관까지 걸었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 너른 홀 우측 전시실로 들어서자 광복 80주년·한일국교정상화 60주년을 기념해 작년 말 시작된 ‘동양지사 안중근(東洋志士 安重根)’ 특별전이 맞이한다.


생을 버리고 의를 취하고 몸을 죽여 인을 이루었네, 안 의사의 거사에 천지가 모두 떨었네.

舍生取義 殺身成仁 安君一擧 天地皆振

_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


문틀 머리에 ‘독립문’이라 적힌 전시실로 들어서자 신미양요가 발발했던 1871년 김성근이 쓴 쇄국의 의지를 담은 흥선대원군의 칠언시가 액자 속에서 맞이한다.

“서양 배 연기와 먼지로 천하가 어둡지만, 동방의 해와 달은 만년토록 밝으리!”


대원군의 의지와는 달리 그 옆에는 1894~1895년 일본군의 인천 공격과 경복궁 침입, 청 웨이하이 함락, 시모노세키 조약, 일본의 러 발트함대 격파 등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그리고 조선 침탈의 전개도가 19세기말 조선 주변 상황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외교권을 박탈당한 1905년 을사늑약, 1907년 군대 해산과 고종의 강제 퇴위, 그리고 1910년 한일강제병합을 통해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1877년 사이고 다카모리가 주도한 사무라이 반란인 서남전쟁(상,중)/1894년 청일전쟁 중 평양성 함락 후 일본군이 승리를 기념하는 장면(하)을 묘사한 우키요에(浮世絵) 판화


그 맞은편엔 명성황후 민자영의 인물사진과 그녀의 유묵 ‘옥골빙심(玉骨氷心)’, 그리고 외교권 박탈과 한일합병에 협조한 을사오적의 사진이 유리 진열장 속에 나란히 자리한다. 을사오적 사진 옆 액자 속 이완용의 칠언절구가 그의 오판과 어리석음을 자백하듯 걸려 있다.

“피로써 이름을 다툼은 도리어 어리석으니 정성을 미루어 대중에 미쳤으니 무엇을 의심하랴 당당한 신무(神武)는 천추의 사업이니 바로 공명을 이룸이 이때에 있다네.”


다음 전시실은 '독립전쟁과 동양평화의 꿈’ 제하로 민영환의 절죽도, 김가진의 초상화, 김구의 유묵, 1907년 정미의병, ‘대한독립’ 등 안중근의 유묵, 안중근의 하얼빈 거사와 그에 대한 쑨원(孫文, 1866–1925)과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 1871–1911)가 남긴 시(詩) 등을 만난다.


맨 안쪽 전시실엔 한용운(1879–1944)의 《조선독립의 서》와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소개하고 있다.

“자유는 만물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다. 그러므로 자유가 없는 사람은 죽은 시체와 같고, 평화를 잃은 자는 가장 큰 고통을 겪는 사람이다.”

_한용운, 《조선독립의 서》


“일본 민족은 이미 온통 서양문화의 패도를 택함과 동시에 아세아의 왕도문화의 본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향후 일본이 세계 문화에 대해 서양 패도의 개가 될지, 동양 왕도의 간성이 될지는 일본 국민이 신중하게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_안중근, 《동양평화론》 중

맨 끝 벽면에 걸린 “긴 탄식 끝에 한마디는 먼저 일본을 조문하노라 (長嘆一聲先弔日本)”라는 안중근 의사가 1910년 3월 여순 감옥에서 쓴 유묵이 일본 제국주의의 종국을 예언하고 있다.

<요지연도(瑤池宴圖)> 서왕모(西王母)의 거처인 곤륜산(崑崙山) 요지(瑤池)에서 열리는 연회장면을 그린 그림, 1700~1850년경 조선
18C 조영국이 청나라에 사행(使行)했을 때 함께 간 도화서 화원이 그린 중국의 오악 중 하나인 형산(衡山), 左/백자 산수무늬 사각병, 19세기 조선, 右
경기도박물관 선사·고대실
통일신라 시기 제작 흙으로 만든 불두(佛頭)상, 화성 백곡리 출토, 국립공주박물관 소장
강세황(우)/공민왕과 노국공주(중)/태조 이성계(우) 초상화
백자청화 사자형 주병, 19세기 조선(좌)/태조 왕건 像(중)/청자 사자 장식 뚜껑 향로, 12세기 고려(우)

기획전 전시실을 나와 선사·고대실, 고려·조선실, 그리고 기증실을 둘러보았다. 경기도 지역의 역사와 다양한 유물들, 문중이나 개인으로부터 기증받은 생활사 유물 등이 종류별로 널찍하게 전시돼 있었다. 이어서 들른 오경석 오세창 부자의 삶, 일제강점기 우리 문화유산 수집 보존에 힘쓴 오세창의 수집품 등을 조명한 전시실도 깊은 인상을 안겨 주었다.


고려·조선실에서는 특별한 그림 한 폭이 눈에 들어왔다. <여진족 시전부락 토벌도(壯襄公征討時錢部胡圖)>가 그것으로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였던 이일(李鎰, 1538~1601) 장군이 선조 21년(1588) 함경도를 자주 침략했던 여진족 시전부락을 정벌하는 모습을 그린 기록화이다. '국가유산포털'에 실린 이 그림에 대한 소개 글을 옮겨본다.

제목과 그림, 좌목을 붉은 선으로 구획하고 좌목에도 붉은 선으로 인찰하였다. 좌목에는 대장(大將)인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일과 그 휘하의 조전장(助戰將) 서득운(徐得運), 종사관(從事官) 이용순(李用淳), 승의랑(承議郞) 심극명(沈克明), 심약선교랑(審藥宣敎郞) 이혜정(李蕙汀), 조전장 7명의 이름이 쓰여 있다.
이어 선봉장(先鋒將)인 고령진(高嶺鎭) 병마첨절제사 유극량(劉克良)을 포함한 22명의 좌위(左衛) 소속 군병, 선봉장 함경북도 조방장(助防將) 李薦(李薦)을 포함한 24명의 우위(右衛) 소속의 군병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재관에 의하면 원래는 장양공 이일의 손자 경상좌수사 이견(李汧, 1618~?)이 조부의 공훈을 기념하고 후세에 알리고자 그림을 그려 종손(宗孫)과 지손(支孫)의 집안에 보관하였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남은 것이 한 건 밖에 없게 되자 1849년에 다시 신본(新本) 3건을 만들어 예전에 가장(家藏)했던 대로 보관한다는 내용이다. 전형적인 계축 형식이지만 좌목의 인물들이 공유하였던 결계(結契)의 기념화가 아니라 집안 조상의 행적을 기리기 위한 집안 차원의 기념화로 제작된 점이 주목된다.
좌목 말미에 글을 쓴 이재관이 조선후기 화원(畵員)인 소당(小塘) 이재관(李在寬, 1783~1837)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림의 작자가 이재관인지 아닌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이 그림은 당시의 전투 상황이 잘 표현된 우수한 작품으로 부감시에 의해 여진족 시전부락 일대의 지세(地勢)가 잘 드러나 있고, 전투하는 군사들과 오랑캐들의 모습도 다양한 자세와 움직임으로 그려져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산은 먹선으로 윤곽을 그리고 작은 점을 골고루 찍었으며 나무에서는 화보풍의 남종화풍이 엿보인다. 채색은 적색, 황색, 갈색, 엷은 녹색 위주로 담채되었다.
이와 같이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는 전형적인 계축 형식을 지녔지만 결계(結契)의 기록물이 아니라 조상의 공훈을 기리기 위한 집안 차원의 기념화로 제작된 점, 전쟁 장면을 내용으로 한 점, 무인(武人) 집안에서 주관한 점 등에서 희귀성을 갖고 있고, 이모된 경위가 작품에 확실하게 기록되어 기록화로서의 가치가 인정되고 작품의 수준도 우수하다.

위쪽에 그림의 제목이 있고, 중앙에 여진족을 토벌하는 전투장면을 역동적이고 사실적으로 그렸다. 아래쪽에는 전투에 참여 했던 이일을 비롯하여 휘하 장병들의 계급과 이름이 적혀 있다. 그 가운데 우화 열장(右火熱將)으로 백의종군한 이순신의 이름이 확인되어 백사장에서 보석을 발견한 듯 기쁨이 컸다.

여진족 시전부락 토벌도(壯襄公征討時錢部胡圖)
<여진족 시전부락 토벌도> 부분 확대
우화 열장(右火熱將)으로 백의종군한 이순신이 확인된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남녀노소 관람객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특히 어린아이들의 손을 잡고 온 젊은 부부들이 많이 눈에 띄었는데, 이 박물관이 과거를 보여주는 곳을 넘어 다음 세대에게 역사를 건네는 교육의 장이 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었다. 박물관을 나서 신갈천 인도를 따라 기흥역으로 향했다. 천변에는 백로들이 긴 목을 곧추세운 채 한가로이 서 있고, 나처럼 몸을 잔뜩 움츠린 잔디는 눈 아래에서 머지않아 불어올 봄바람을 고대하고 있다.


*경기도박물관

선사·고대실, 고려·조선실, 기증실 등으로 구성된 전시실에는 상설전시 유물 3,000여 점이 상설 전시되고 있다. 선사·고대실에는 주먹도끼, 토기, 철기 도구 등 구석기·청동기·철기 시대 유물과 당시 사회상이 소개되고 있다.

고려·조선실에는 한양 및 개경 주변의 정치·문화적 변화를 반영한 사료와 조선시대 관료와 사대부의 복식 자료를 살펴볼 수 있다.

기증실에는 문중이나 개인 소장자가 기증한 생활 도구, 장신구, 서신, 초상화 등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경기도의 유래

'경기(京畿)'는 원래 중국 당나라 때의 행정 체계를 고려 시대에 도입하여 개경 주변에 적용한 행정 구역의 이름으로 11세기 무렵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고려 왕조는 1390년에 경기도를 내륙의 경기좌도와 해안의 경기우도로 나누고 수도권 귀족 관료들의 녹봉 근거지로 삼았다.

조선 왕조는 도읍을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전국을 8도로 나누었는데, 세종 시기 지금의 경기도 범위와 거의 같은 행정 구역이 만들어졌다. 1910년에는 지금의 서울인 경성부(한성부)가 경기도에 편입되었다.

1946년에 서울시가 특별시로 승격되면서 경기도에서 분리되었고, 1954년에 휴전선 북쪽에 있는 개성시, 개풍군, 장단군, 옹진군, 연백군 등지를 경기도에서 제외하여 경기도는 2시 19군 8읍을 관할하였다.

1967년에는 서울특별시에 있던 경기도청이 수원시로 이전하였고, 1981년에 인천시가 직할시로 승격하면서 경기도에서 분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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