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릉수목원 소요(逍遙)

by 약천

봄날의 주말 아침, 차를 몰아 광릉으로 향했다. 연무와 안개가 짙게 깔린 도로 위에는 주말임에도 차량이 많았지만 정체가 없어 다행이다.

약속 장소인 진접역에 도착해 친구들을 기다리며 역사 지하 홀에 있는 주변 안내도를 살펴보았다. 벽면 한편에 다산의 <하피첩에 부쳐>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귀양살이 시절 두 아들에게 선비의 마음가짐, 효와 우애의 가치 등 교훈이 될 만한 글을 아내가 보내온 해진 치마에 적어 보낸 아비의 애절한 마음이 시공을 훌쩍 뛰어넘어 전해온다.

"몸져누운 아내가 해진 치마를 보내왔네. 천리의 먼 곳에서 본마음을 담았구려. 오랜 세월에 붉은빛이 이미 바랬으니 늘그막에 서러운 생각만 일어나네. 재단하여 작은 서첩을 만들어서는 아들 경계해 주는 글귀나 써보았네. 바라노니 어버이 마음 제대로 헤아려서 평생토록 가슴속에 새겨두거라."


인근에는 해밀마을과 여러 공원, 산과 봉선사 등 사찰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미 방문했던 산들도 떠올리며 오늘의 목적지인 수목원에 대한 기대가 커졌다. 친구들을 픽업하여 7km여 떨어진 광릉수목원으로 이동했다. M이 입장권과 숲 해설가의 안내를 미리 예약해 두었던 탓에 지체 없이 수목원 탐방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 수목원은 국내 유일의 국립 수목원으로, 1987년 올림픽을 앞두고 지정된 이후 지금까지 숲의 가치를 온전히 지켜온 곳이다. 이곳은 본래 조선 왕실의 사냥터로 제7대 임금 세조의 릉이 자리했기 때문에 반인이 범접할 수 없는 곳으로 엄격히 통제되어, 오래된 숲의 깊이와 품격을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입구를 지나 숲 해설사의 안내를 따라 걸음을 옮기자, 다양한 나무들이 해설사의 입을 빌어 저마다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메타세쿼이아 나무는 수분을 머금어 부드러운 촉감의 껍질을 가지고 있으며, 구상나무는 크리스마스트리로 사용되지만 해외에서 개량되어 역으로 수입된 ‘슬픈 나무’라는 설명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이름마저 정겨운 귀룽나무가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각각의 나무는 생김새뿐 아니라 인간의 삶과 얽힌 사연을 품고 있었다.


또한 이른 봄에 피는 꽃들에 대한 이야기들도 이어졌다. 햇빛이 있어야만 꽃잎을 연다는 꿩의바람꽃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서양에서는 아네모네라 불리는 이 꽃은 ‘바람의 신’을 남편으로 둔 여인의 이야기에서 유래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자연의 한 장면에도 신화와 상상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이 새삼 흥미롭다. 이어 봉선사천을 오른편에 끼고 이어진 데크길을 따라 오르자, 얼음 사이를 비집고 올라온다는 노란 꽃, 복수초가 봄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수목원을 대표하는 수종이라는 복자기나무는 지금은 평범해 보이지만, 가을이 되면 누구보다도 화려한 빛을 발한다고 한다. 가을 단풍 중에서 아름답기가 으뜸이라는 것이다. 어린 시절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가시를 두른 음나무 역시 인상적이다. 성장하면 가시를 버리는 모습은 생존을 위한 자연의 전략을 보여준다. 한편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라는 느티나무는 ‘밀레니엄 나무’라는 별명을 가진 친숙한 존재이다. 나무 하나하나에는 생태적 특징뿐 아니라 역사와 문화가 함께 담겨 있었다.

탐방로 한가운데 서있는 느티나무 가지 위에 앉은 곤줄박이 한 마리가 해설사의 손바닥 위로 내려앉아 먹이를 쪼아 먹는 장면은 이날의 작은 하이라이트였다. 사람을 경계하지 않는 이 새는 지능이 높아 예로부터 점을 치는 데 쓰이기도 했다고 한다. 야무지게 설명을 풀어놓는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자그마한 키의 여성 해설가와 서로 낯익은 친구로 보이는 그 곤줄박이는 모이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H에게는 다가올 기색이 없어 보인다.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 지정 기념비
숲의 명예전당
대왕참나무 잎사귀


이어 소개된 가래나무는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는 속담 속 주인공으로, 열매 모양이 농기구 ‘가래’를 닮아 이름 붙여졌다. 습지에 가까운 곳에서는 ‘물가의 발가락 왕’이라 불리는 낙우송이 사방으로 발가락을 닮은 뿌리 일부를 땅 위로 드러낸 독특한 뿌리 구조를 보여주고 있고, 노란 꽃을 주렁주렁 매단 히어리는 ‘황후의 귀고리’라는 별명처럼 우아한 자태를 뽐냈다. 해설사는 숲의 구성원들은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 서로 연결된 생태계임을 강조했다. 이곳은 2010년 유네스코 생물권보존지역으로 지정될 만큼 생태적 가치가 높은 공간이라는 말에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우리나라가 과거 황폐했던 산림을 복구하기 위해 100억 그루 이상의 나무를 심으며 산림녹화에 성공했다는 이야기 역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숲의 명예 전당에는 민둥산 일색이던 전 국토를 무성한 숲이 뒤덮는 기적을 일궈낸 녹화사업의 기틀을 마련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롯해서, 민병갈 등 여덟 분의 부조상이 자리한다. 그중 미국인 민병갈은 태안의 천리포수목원을 일군 인물로, 우리나라 산림문화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국토녹화 기념비를 지나 오른편에 서 있는 비술나무는 겨울철 가장 아름다운 나무로, 가느다란 가지가 마치 폐의 모세혈관처럼 섬세하게 퍼져 있다. 또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 우승 후 들여왔다는 대왕참나무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가지를 넓게 펼친 ‘반송’이라 불리는 소나무, 택배기사들이 제일 싫어하는 나무라는 해설사의 농담조 이야기기가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줄기에 얼룩이 있는 물푸레나무는 조선시대 곤장 재료로 쓰이다가 치사율이 높아 금지된 사연을 지녔으며, 이후 회초리나 야구방망이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옛날엔 서당 훈장들이 '훈계의 매'로 애용했던 까닭에 장원급제자가 가장 먼저 찾아와 절을 올렸다는 얘기도 전해진다고 한다.

잎을 떨군 겨울에 자태가 돋보인다는 비술나무
'국토녹화기념'비

따스한 햇살을 받은 복수초는 더욱 선명한 노란색 빛을 발했고, 무궁화는 한 나무에서 2~3천 송이의 꽃을 피우며 피고 지기를 반복한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화살나무는 어린 시절 날개 같은 돌기를 만들어 벌레를 막다가 성장하면 이를 없애는 독특한 생존 전략을 보여준다고 한다. 줄기를 비롯해서 가지도 온통 붉은색을 띤 흰말채나무, 그리고 마가목과 말오줌나무 등 그 이름에 ‘말’이 들어간 나무들도 흥미롭게 소개되었다. 이외에도 풍년화, 히어리, 깽깽이풀 등 다양한 야생화에 대한 소개가 이어졌다. 박물관 앞에는 오래된 복자기와 비술나무 고목이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전나무 숲길 입구에 이르러 자신의 임무를 마친 해설사는 인사를 남기며 안내를 마무리했다. 숲 해설사의 안내 덕분에 평소에는 무심코 지나쳤을 자연의 요소들이 새롭게 다가왔고, 숲의 구성원들에 대한 이해도 한층 깊어졌다. 수박 겉핥듯 대충 둘러본 식물원을 비롯해서 박물관과 야생화 구역 등을 살펴보지 못한 아쉬움은 다음을 기약했다.

독성각·북두각·신령각의 불화
봉선사 연못 주변 모습

수목원을 뒤로하고 봉선사 초입 능안마을 음식문화테마거리의 '크낙새**'라는 이름의 식당에서 산채비빔밥으로 허기를 채웠다. 식사 후 봉선사 경내를 둘러보았다. 일주문으로 들어선 후 너른 연못 옆길을 거쳐 느티나무 고목이 버티고 선 비탈을 지나 천왕문으로 들어섰다. 대웅전 앞마당 머리 위에는 저마다의 기원을 담아 불응 밝힐 연등이 빼곡히 걸려 하늘을 가리고 있다.

고려에 창건되고 조선 왕실의 원찰로 이어져 온 시간의 결 위에, 6.25 때 소실된 것을 다시 세우며 ‘큰 법당’이라는 한글 현판과 주련을 건 대웅전이 이채로웠다. 큰 법당 뒤편에 나란히 자리한 독성각·북두각·신령각은 불교를 중심으로 도교적 별신 신앙과 토속 산신 신앙까지 품어낸 모습으로, 이 땅의 신앙이 어떻게 서로를 배제하지 않고 끌어안으며 이어져 왔는지를 보여준다. 예종 원년인 1469년에 선친인 세조를 위해 제작했다는 봉선사대종을 마지막으로 둘러본 뒤, 천천히 경내를 빠져나왔다.

진접역 바로 옆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겨 함께한 여흥에 커피 향을 더했다. 얼마 전 장남의 결혼식을 치르며 큰일을 마친 B, 동네 야산을 걷다 넘어져 팔목 수술을 받고 아직 회복 중인 M, 시골에서 노모를 모시며 농사일로 바쁘다는 H까지—저마다 각자의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봄기운 완연한 수목원과 사찰을 잇는 호젓하기 그지없는 봄날의 소요였다. 26-0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