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의 뜨거운 속살에 몸을 맡기다

하지(夏至) 관악산행

by 꿈꾸는 시시포스

낮이 가장 긴 날이라는 하지다. 청계산과 저울질을 하던 추가 관악산 쪽으로 기울었다. 관악산은 경기 오악, 즉 경기도에 있는 험한 바위산 다섯 개 가운데 하나다. 청계산이 육산, 즉 흙으로 덮인 유순한 처녀같은 산이라면 관악산은 바위 투성이의 우락부락한 사내를 닮은 산이라고나 할까.


뜨겁게 달아오를 관악의 속살 바위에 몸을 맡겨 볼 요량이다. 익숙한 산도 오랜만에 찾으면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반갑고 수많은 코스 가운데 새로운 길을 택한다면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게도 된다.

평소 같으면 느긋하게 게으름을 만끽하고 있을 휴일 아침이지만 8시가 가까워오자 부지런한 태양은 벌써 중천을 향해 맹렬히 질주하고 있다. 과천 보건소 뒤 산자락으로 들어서서 새바위 능선을 따라 일명사지, 두꺼비 바위, 해골바위를 거쳐 송신소 옆 헬기장으로 올라 연주대, 연주암을 거쳐 하산하는 코스를 그려본다.

관악산 기슭에서 바라본 과천 시가지 너머 자리한 청계산

키 큰 참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들머리를 지나 바위로 덮인 비탈이 시작되면서 크게 자라지 못한 소나무, 측백나무, 떡갈나무 등이 강한 생명력으로 녹색의 빛을 잃지 않고 있다.

차량 소음, 공사장 철근 부딪히는 소리, 까치 소리, 도시의 웅웅 거리는 소리 등이 한데 엉겨 신음하듯 산자락을 따라 울린다. 몸을 돌리니 아파트 숲 뒤로 청계산이 아침 안갯속에 흐릿한 실루엣을 드리우고 있다. 우측 능선 너머로 안양 등 도시 빌딩들은 키재기 하듯 숲 사이로 머리를 내밀었다.

시간에 쫓길 일이 없으니 마음은 느긋하다. 하지의 뜨거운 태양은 오래도록 하늘에 머물 것이다. 햇빛에 고스란히 노출된 암반 비탈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나무 그늘에 앉아 모자를 쓰고 얼굴과 팔에 썬 크림도 꼼꼼히 발랐다. 벌써 하산하는 사람도 더러 있는데 대부분 맨손으로 아침 운동을 다녀오는 동네 주민들이지 싶다.

누군가 손바닥 만한 비석처럼 각진 돌 하나를 길옆 바위 위에 올려놓았다. 무엇이든 높이 쌓고 세우고 오르려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8천 미터가 넘는 숱한 고봉들을 오른 등반가 라인홀트 메스너의 책 <죽음의 지대>에 대해 서평은 "이 책은 '아래로' 파고드는 내면의 등반을 이야기한다!"라고 갈파하고 있지만...

관악산 암릉 사이로 보이는 방송 통신탑

길바닥 송충이에 놀라고 목덜미 뒤 등 속으로 들어간 솔잎에 신경이 거슬리고 모자챙에 가려 이마가 소나무 가지에 부딪히는 등은 산행 중 흔한 일이다. 여름 산행 중 예기치 못한 소나기는 고역이지만 이내 체념하고 그와 동화해 버리는 쾌감마저 있지만, 최대 난적이자 동반자는 대책 없이 흘러내리는 땀이 아닐까 한다.

능선 너머에서 장끼가 '꺼억 꺽' 한 번 울음을 운다. 그 소리는 관악산 생태계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몸부림처럼 힘겹게 들린다. 관악산 주봉 능선은 앞쪽으로 여러 개의 작은 암봉들을 세워두고 자신은 멀찍이 뒤로 물러나 앉아 있다.

5부 능선쯤의 일명사지 옆 능선 마루 너럭바위 위에 올라섰다. 연주대 육봉 능선 모락산 광교산 백운산 등이 눈에 들어온다. 주릉 위 송신소까지 1.1km라는 이정표에 달린 온도계는 섭씨 36도를 가리킨다.


"너무 덥지요?"
"예 햇빛이 강하네요."
"와우 이쪽은 또 다른 모습이네!"
어떤 이는 더운 날씨에 혀를 내두르고
어떤 이는 관악의 새로운 면모에 감탄한다.

조망이 좋아지는 5부 능선부터 관악산은 속살을 하나씩 내놓는다. 갈래갈래 뻗어 내린 능선의 숲을 비집고 불끈불끈 솟아오른 암반들이 갖은 포즈로 온몸의 근육들은 낱낱이 자랑하는 보디빌더를 보는 듯하다.

앞을 우뚝 막아선 새바위를 우회했다. 머리를 치켜들고 날갯죽지를 한껏 웅크린 채 하늘을 향해 비상하려는 형상의 바위가 한 마리 거대한 맹금류를 보는듯하다. 8부 능선쯤에 평평한 능선 암반 위에 어른 키 세 배 높이 입을 앙다문 모양의 두꺼비 바위가 앉아 있다. 노 산객 한 분은 햇빛을 피해 바위 아래 그늘에 앉아 목을 축이고 있다.

두꺼비 바위 지나서 세 갈래 길 가운데 송신소 쪽으로 오르는 가파른 능선 코스로 나아갔다. 송전탑 아래 암릉을 지나 팔봉능선과 연주암을 잇는 주릉의 헬기장으로 올라섰다. 이제 모든 크고 작은 봉우리가 모두 발아래다. 흙으로 덮인 능선 너머 사면은 무성한 숲이 하늘을 덮었다. KBS 송신탑이 서있는 봉우리 아래 좌측으로 휘돌아 연주대로 향한다.

상단이 거대한 골프공처럼 생긴 기상관측 레이더가 자리한 봉우리 오른쪽으로 우회했다. 연주암 관망대부터 연주대로 오르는 계단을 체인처럼 산객들이 줄지어 꼬리를 물고 오른다.

관악산 암릉을 타는 산객들

관악산 정상부를 이루는 거대한 암봉 비스듬한 사면 가장자리에 앉은 산객들이 전깃줄에 나란히 앉아 강남 갈 채비를 하는 제비 떼 같다. 그 아래 정상 표지석 앞엔 인증 사진을 찍으려는 산객들이 길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남녀노소가 따로 없지만 특히 젊은이들이 많아 보인다. 얼마 전에 코로나 19로 인해 등산객이 늘었다는 뉴스 보도도 있었다.

정상 우측 천애 절벽 위에 자리한 연주대에는 암자 앞과 측면에 불자들이 어깨를 나란히 맞대고 절을 올리고 있다. 저들의 기원은 얼마나 간절하여 뙤약볕과 험한 산길을 마다하지 않고 백척간두 위 암자를 찾은 것일까? 암자에서 발길을 돌려 하산 길 기점에 있는 염주암으로 향했다.

연주암 대웅전에서는 불경 소리가 끊이지 않고 그 앞에는 불자들이 합장을 하고 예불을 드리고 있다. 677년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연주암에는 대웅전, 금륜보전, 천수관음전, 효령각, 연주대의 응진전 등의 당우들이 남아 있다.

삼층석탑이 자리한 마당을 가로질러 추사 김정희의 글씨라는 ‘无量壽’ 현판이 걸린 요사채의 너른 툇마루 한켠에 걸터앉았다.

섬돌에 신발을 벗은 산객들은 그늘진 너른 툇마루 위에 앉거나 벽에 등을 기대거나 드러누워서 목탁소리와 불경 외는 소리와 산들바람에 귀를 열고 온몸을 내맡기고 있다. 연주암에서 내려서며 뒤돌아보니 툇마루에 걸터앉은 산객 중 일부는 몸을 산중에 들이고서도 마음은 세상을 향하고 있는지 손에 든 스마트 폰에 얼굴을 처박고 있다.

김정희의 '무량수(無量壽), 오세창의 '산천일월가(山川日月佳)'

해우소에 들렀다가 불경 소리를 뒤로하고 긴 계단을 따라 하산길로 접어든다. 바람이 제법 시원하고 잘 닦인 돌계단은 발이 한결 편하지만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주 등산로이다 보니 오르고 내리는 사람들로 번잡하다. 더러 동행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수다를 떨며 좁은 등로를 가로막아 다른 산객에게 불편을 주는 사람도 있어 쯧쯧 혀를 차게 한다.

하산길 옆 계곡은 물이 바짝 말랐는데 약수터 두 곳은 물이 고여있고 음용에도 '적합'이라 그중 한 곳에서 찬 약수를 한 바가지 퍼서 갈증을 달랬다. 사람들 발길로 번잡한 길을 버리고 계곡 건너 능선으로 올라섰다. 정오의 태양은 묵묵히 동행하던 그림자마저 도망치게 했다. 강한 햇빛에 달아오른 바위 능선을 타고 오는 바람이 후끈후끈하다.

"먼저 내려오세요."
"고맙습니다. 날씨가 무척 덥네요."
"마침 오늘이 하지잖아요."

바위벽으로 오르는 산객 한 분과 벼랑을 마주하고 서서 한 두 마디 주고받았다. 모자와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배낭을 메고 양손에 스틱을 든 장년의 산객은 관악산 육봉 능선, 팔봉능선 등 여러 능선들과 산행코스를 나열하며 북한산에 못지않은 명산이라고 관악산을 추켜 세운다.

등 뒤로 송신소 첨탑이 보이고 앞으로 청계산과 백운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능선 바위 그늘에 앉아 바람과 벗하며 허기를 달랬다. 생수에 오미자 주스를 섞어 얼려서 가지고 온 물이 알맞게 녹아서 갈증을 쫓아 준다.

관악산 자락과 청계산 사이 쓰나미에 밀려온 잔해처럼 하늘 높이 솟은 아파트 단지들이 무질서한 듯 빽빽하고 어지럽게 자리하고 있다. 산자락 가장자리 참나무 숲을 나서며 원점회귀 산행을 마무리한다. 태양빛에 달아오른 후끈한 열기가 온몸으로 훅하고 덮쳐온다.

농촌은 감자 마늘 보리 등 수확과 밭매기로 가장 바쁠 시기로 일 년 중 태양이 가장 높이 길게 뜨는 하지 날이 아니던가. 주중 예보된 장맛비가 미열처럼 이는 마음의 근심도 식혀주길 바랄 뿐이다.

#산행 #관악산 #연주암 #새바위 #하지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