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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인산 Aug 31. 2020

능평리 가는 길

영장산 넘어 문형산 선친 뵈러

설날을 하루 앞둔 섣달 그믐날이다. 탄천 버들강아지들이 서로 몸을 기대고 밤새 얼었던 몸을 아침 햇살에 녹이고 있다. 왜가리는 몸을 잔뜩 움츠린 채 얕은 물가에 발을 담그고 미동도 않는다. 물속 팔뚝만 한 잉어들은 다리 위를 지나는 행인이 행여 보시라도 할까 해서 다리 아래로 모여든다. 까치 참새도 깍깍 짹짹 지저귀며 날갯짓이 분주하다. 사람들도 천변 공원에 아침산책을 나왔다.

편의점에 들러 생막걸리와 요깃거리 등을 사고 나이 지긋한 점원과 서로 새해 복을 기원하며 덕담을 건넸다. 태원 지하보도를 건너면 이 지역 문화의 메카로 자리 잡은 성남아트센터다. 그 앞마당엔 설을 맞아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 효 음악회'를 비롯 여러 콘서트를 알리는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맹산으로도 불리는 영장산으로 가는 길목 매지봉은 문어 발처럼 여러 갈래 능선을 내리 뻗고 있다. 아트센터 뒤쪽 능선 길은 처음이다. 능선 마루 이정표가 정상까지 4.1km라고 알린다. 고도가 올라갈수록 건너편 청계산과 우담 바라봉 모습이 선명하다. 그 능선과 이편 맹산 자락에 하얀 몸체를 반쯤 감춘 아파트 군락이 탄천을 따라 길게 누웠다.

오늘 여정은 종지봉, 영장산, 문형산 정상을 거쳐 문형산 자락 능평리 선친 산소까지 15킬로 미터 가량 걷는 길이다. 산정으로 가는 길에 마주치는 산객은 대부분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는 사람들이다. 9시가 다 되어 집을 나섰으니 당연하다 싶다. 그렇지만 오늘만큼은 급할 것 하나 없다.

매지봉 조금 지나서 정상 가는 길목의 산불 감시탑에 올랐다. 밑에서 올려다 보기에 그리 높지 않아 보이지만 나선형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서 아래쪽을 보면 오금이 저리다. 그 꼭대기에 서면 훈련소 유격훈련 때 낙하훈련 점프대 위에 섰을 때의 아찔함이 온몸으로 느껴온다.

나이가 들고 장년의 가장이 된 지금, 선친이 지나왔을 길도 저 감시탑처럼 가파르고 아찔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구팔오 년 수색 달동네 단칸방, 그해 겨울 추위는 매서웠지만 마음속에 칼처럼 돋친 원망의 날은 더 매섭고 날카로웠었다.


어느 산이든 정상으로 가는 막바지가 가장 힘겹다. 불행인지 숙명인지 인생의 막바지도 산행과 닮은 듯하다. 자각할 새도 없이 훌쩍 지나가 버리는 짧은 전성기를 지나면 힘겨운 고비가 기다린다. 그 고비를 잘 넘어서면 다행이지만 암초에 걸려 좌초하거나 엎어져 코 깨지기가 다반사다.

영장산에서 태재로 내려가는 능선 좌측 광주시 직동에 격동의 시대 려말 선초를 살다 간 청백리 맹사성(1360~1438) 선생이 영면하고 있다. 온양 출생으로 시문에 능하고 고유 음악인 향악을 정리하고 좌우의정 대제학에 청백리였던 선생이 이곳에 영면하는 연고는 '맹산' 지명으로 짐작할 뿐 알 수 없다. 그가 남긴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 한 구절 읊어 본다.

"강호에 겨울이 오니 눈 깊이 한 자가 넘는다.
삿갓 비스듬히 쓰고 도롱이 옷을 삼으니
이 몸이 춥지 아니한 것도 亦君恩이샷다."


그 아래 능선 좌측 철망 너머로 어른들의 놀이터 **CC가 한눈에 들어온다. 인정사정없는 드라이버에 얻어맞은 골프공의 외마디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지고 그 사이사이에 '굿샷' 추임새도 간간이 섞여 들려온다.


마을이나 야산 언덕배기에 터를 잡는 까치와 달리 높은 능선은 까마귀들이 주인이다. 길조라 여겨온 까치와 달리 까마귀는 터부시 되어 왔지만 산정 언저리 너른 하늘을 활공하는 까마귀를 볼 때면 부럽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모든 존재는 자유하고 자재하지만 편견을 만들고 편을 가르는 것은 인간들의 습성인가 보다.


새말길 삼거리를 건너 문형산 자락으로 올라섰다. 산정으로 가는 길은 완만하여 걷기가 편하고 가파른 고비도 없이 산객을 품어주어 인자한 아버지 같다. 온 산이 다 내 차지고 앙상한 마른 가지를 따다 다닥- 쪼아대는 딱따구리 소리만 간간이 정적을 깬다. 마른입 속 입등에 엉겨 붙는 끈적한 침을 간간이 내뱉었다.

문형산 자락엔 겨울 삭풍이 물러나고 따스한 햇볕이 길게 내려 쬐고 있다. 이내 도착한 문형산 정상 표지석에 인사하고 되돌아섰다. 오포터널 쪽 능선으로 들어서면 2005.5월 신현리 주민들이 세운 일출단 표지석이 맞이한다. 툭 인 동쪽으로 마름산, 백마산, 구름산, 태화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굽이 흐르는 경안천, 광주시 마을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내일 아침이면 많은 해맞이객들이 이곳으로 몰려올지도 모르겠다.

능평리 문형산 자락 동편에 위치한 공원묘원 '시안'은 망자들의 안식처로 그 규모가 남다르게 방대하다. 혼백들이 어깨를 맞대고 능선 아래 마을과 시원스레 잘 뚫린 도로들을 굽어 보며 한낮 햇볕을 즐기고 있다.


그 반대쪽 서편 안락의자처럼 아늑한 문형산 자락 능평리에 판교공원묘원이 자리한다. 선친은 아름드리 노송이 그늘을 드리우고 불곡산 너머로 광교산과 백운산 능선이 보이는 곳에 잠들어 계시다. 몰래 등 뒤로 다가와서 와락 껴안는 아이들처럼 공원묘원 뒤 능선으로 내려와서 갑자기 문안하는 아들 모습에 선친은 깜짝 놀라실까 반가워하실까.

묘소 위에 떨어진 송진과 솔잎을 걷어내고 배낭에서 막걸리, 포도주, 어포, 사과 등을 꺼냈다. 생전에 즐겨 드시던 소주 대신에 오늘은 내 취향대로 생막걸리를 올렸다. 생전 선친과 마주 앉아 술잔을 들어본 적은 없지만 명절 때 음복주로 청주를 따라 주시곤 했다. 한 달 후면 돌아가신 지 십 년인데 선친에 대한 기억은 늘 어제처럼 생생하다.

문안만 드리고 금방 자리를 뜨던 예전과 달리 엉덩이를 땅에 붙이고 앉았다. 두 어 잔 막걸리를 올린 후 옆에 나란히 앉아 먼 산줄기를 바라보며 음복하고 느긋하게 컵누들에 커피까지 한 잔 들었다.

설날을 하루 앞두고 성묘객들이 여기저기 묘지 앞에 모여 있다. 낮 한때 산 자와 망자가 함께하는 공원묘원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없고 우주 만물을 지배하는 시간도 잠시 멈춘 듯하다. 묘소 옆 노송은 푸른 가지를 멋스럽게 늘어뜨리고 불로장생의 꿈을 꾸고 있는 듯 고요하다. 멀리 광교산 능선 위로 흰 구름이 높게 떴다. 20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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