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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인산 Oct 01. 2020

복병산, 봄 속으로 헤엄치다

부산 중구 복병산

바다쪽 현관 높이 '수호제일관문(守護第一關門)' 편액이 걸린 부산세관의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었다. 새내기 직원 100여 명이 이틀간 실무수습을 왔더란다. 갑자기 늘어난 식수 인원으로 인한 혼잡을 피하려 구내식당 점심식사 시간이 10분 앞당겨졌다. 일찌감치 점심을 들고 C 과장과 함께 산책을 나섰다. 행선지는 중앙대로 건너편 보수산과 용두산 사이에 살짝 비켜 앉아 있는 복병산(伏兵山)이다.


후문을 나서서 중앙역 지하도를 건너 13번 출구로 나오면 '40계단 문화관' 앞 골목이다. 보도 위의 지게를 벗고 짧은 휴식을 하는 짐꾼들 像과 물동이를 머리와 어깨에 이고 멘 어린 자매 조각상이 눈길을 끈다. 문화관은 40계단 부근 6.25 피난민들의 힘겨웠던 생활상을 비롯해서 개항 이전부터 일제강점기, 광복과 6.25에 이르기까지의 이 지역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동광동 주민센터 앞 나선형 계단을 올라 남성여고 입구로 들어서면 그 옆에 '복병산 체육공원' 들머리가 있다. 야트막한 복병산에 기대어 남성여고를 비롯 중구청 기상관측소 남성초교가 자리하고 있다.

계단을 오르면 고목이 늘어선 배수지를 따라 철봉 평행봉 등 운동시설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0년에 건설된 부산 최초 상수도 시설인 복병산 배수지는 백양산 골짜기와 성지곡 수원지에서 끌어온 물을 각 가정으로 공급한단다. 배수지 입구에 '선경의 물처럼 마르지 말라'는 뜻의 '瑤池無盡' 네 글자 석조 현판이 붙어 있다.

배수지를 가로질러 싱그런 동백나무가 줄지어 선 나무계단을 지나 산죽이 무성한 경사로를 따라가면 산정 격인 평지 위에 팽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팽나무 앞 안내판은 예전 이곳이 왜관을 드나들던 왜인들의 난동, 풍기문란, 밀거래 등을 감시하려 병사들이 복병 막(伏兵幕)을 설치하여 잠복했던  곳이라 설명한다. 일견 세관 감시초소 격이었다고 할까. 수령 130여 년 된 팽나무만이 그 유래를 기억하려는 듯 자리를 지키고 있다.

벤치가 놓인 쭉쭉 곧게 뻗은 나무 숲길을 지나 중구로 쪽으로 내려섰다. 봄 햇살은 따사롭고 바람은 시원하다.

대청로 사거리로 가는 중구로 노변 가톨릭센터 화단에는 '독재타도 민주헌법 쟁취'라 쓰인 기념석과 함께 대통령 직선제 등 개헌을 이끌어낸 1987년 6월 항쟁의 중심지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있다.


대청 사거리와 보수 사거리 사이 대청로 노변 북측에 보수동 책방골목은 세월을 잊은 듯 예스런 모습을 고집하고 있다. 큰길 인도에서 골목으로 들어서서 어깨를 맞대고 촘촘히 늘어선 책방 점포들을 수박 겉핥듯 서둘러 둘러보고 발길을 돌렸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삼삼오오 짝하여 하교하는 여학생들, 점심을 들고 일터로 돌아가는 사람들, 마실 나온 노인들 등 저마다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이는 봄 속을 유유히 헤엄치고 있는 수채화 같은 한낮이다.

퇴근길에 N, B와 생탁 한 사발을 나눴다. 싱그런 봄이 보리밭처럼 바람에 일렁이는 밤이다.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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