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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인산 Aug 21. 2020

유토피아는 어디에

바야흐로 바캉스 시즌이다. 칠월에서 팔월로 넘어가는 길목은 장마가 끝나고 무더위가 절정으로 치달았다. 주문진 소돌과 속초 아야진 해변은 무더위를 피해 도시를 탈출한 피서객들로 빼곡하다. 설악산 자락 H콘도 옆에 있는 워터피아 주차장은 빈자리가 없고 매표소 앞은 젊은 부모들과 아이들로 줄이 길다.


동심은 놀이할 생각만으로도 천국에 온 듯 행복감에 빠져드는 모양이다. 같은 여름이지만 많은 인파와 번잡함이 싫은 어른들의 여름은 아이들의 여름과는 확연히 다르다. 유년시절 동심은 세월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내 마음속엔 화석처럼 흐릿한 추억만 남았나 보다.


어제 하루 바닷가에서 아이들과 놀아준 노고를 치하라도 하듯 아내는 오늘 아이들과의 물놀이 당번을 자처했다. 워터피아로 간 아내와 아이들처럼 나도 나만의 유토피아에 안겨보고 싶었다. 마침 눈 앞에 손에 잡힐 듯 설악이 손짓한다. 친구들을 따라다니다가 맛을 들인 산행의 끼가 황홀한 설악의 풍광 앞에서 주체하지 못하고 가슴 한구석에서 들썩거렸다.

울산바위 줄기는 미시령을 건너 북북동 바다로 내달리다 해발 1052 미터 마산에서 고도를 낮추며 죽변봉, 오음산, 고성산 등 여러 봉우리로 솟구쳤다가 동해 해변으로 잦아든다. 온전히 내게 주어진 틈새 시간을 채우기에 적당하다 싶어 죽변봉을 목표로 그 들머리로 생각되는 도원리로 차를 몰았다.

설악산 자락 여러 골짜기에서 도원리 계곡으로 모인 맑은 물은 도원저수지에서 흐름을 멈추었다가 문암천을 이루어 동해로 흘러든다. 저수지에 맞닿은 계곡 끄트머리에 놓인 다리 건너 신선사에 들렀다. 피서객들이 들어찬 상류 쪽 계곡과는 달리 계곡 초입 작은 그 절집은 적막하다. 대문도 없는 입구로 조심스럽게 들어서자 마당을 쓸던 스님 한 분과 꼬리를 치는 황구 한 마리가 반겨준다.


대웅전을 뒤로하고 요사채가 앞마당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그 절집, 양팔을 가슴 높이로 가지런히 모으고 왼쪽 손바닥 위에 보병을 받쳐 든 4~5미터 높이 순백의 대리석 관세음보살상이 시선을 끈다. 담벼락 옆으로 반듯하게 줄지어 서있는 어른 키 높이의 석조 십이지신상은 절집과는 어울리지 않은 듯한데 모습은 태연해 보인다.


마루에 걸터앉아 신선봉에서 따온 이름이라는 길지 않은 절집 내력과 도원리 마을에 대해 주지스님과 잠시 얘기를 나눴다. '누렁이'란 이름의 황구는 등치가 크지만 유순하다는 스님의 말에 등을 몇 번 쓸어주니 아예 낯선 객 곁에 와서 안긴다. 여름 한때 더위를 피해 불쑥 찾아와서 안겨도 거부하지 않고 반겨주는 저 동해 바다의 넉넉하고 자비로운 성품을 닮았나 보다.


찾는 이가 드문 때문인지 죽변봉 들머리에 대한 실마리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신선사 주지스님과 몇몇 주민에게 물어물어 도원리 입구에서 계곡을 낀 임도를 찾아 그 길을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숲에서는 매미와 여치 등 온갖 풀벌레들의 합창이 그치질 않는다. 화원에 들어선 듯 꽃들이 만발한 임도는 뾰족한 산 봉우리를 오른편에 끼고 움푹 들어간 골과 계곡, 툭 뻗쳐 나온 능선을 따라 돌고 돈다.


숨을 죽였다가 불쑥불쑥 더운 바람과 서늘한 바람이 번갈아 가며 골과 능선을 따라 스쳐 지나간다. 그것은 고단한 긴 인생길에서 간간이 만나는 작은 위안처럼 피로를 덜어준다. 가파르고 험한 능선을 깎고 잘라서 닦은 임도는 봉우리로 오르는 길을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다. 내 발걸음도 설악에 걸린 안개구름처럼 차츰 들머리에서 멀어지며 미시령 쪽으로 구불구불 흘러간다.


아내가 물의 천국 워터피아에 데리고 들어간 아이들은 한창 물놀이에 여념이 없을 것이다. 나는 죽변봉으로 오르는 입구를 찾지 못하고 임도만 따라가고 있다. 마냥 늘어질 수 없는 산행이라 결단을 해야 할 때다. 혹처럼 튀어나온 바위능선을 골라잡아 봉우리를 향해 치고 오르는데 빼곡한 잡목이 앞을 막아서서 전진이 더디고 힘겹다.


천신만고 끝에 작은 봉우리에 올라서니 잎과 가지가 무성한 나무가 들어서서 시야를 가렸고 아무런 표지도 사람의 흔적도 찾을 수가 없다. 툭 터인 전망, 시원한 바람, 들꽃의 향연,... 애초에 기대했던 이런 것들은 신기루처럼 잡을 수 없는 허황한 기대였나 보다 그냥 호젓하게 청간정, 의상대 등 해변의 관동팔경이나 둘러볼 걸 하는 후회스러운 생각도 잠시 스쳐갔다.


경포대 누각 위의 피서객들

가벼운 마음으로 정오쯤에 시작한 산행이 두 시간쯤 지났다. 햇빛이 들지 않아 으스름하고 길도 없는 숲은 나아갈 것인지 물러설 것인지 강단을 시험한다. 앞을 알 수 없어 막막했던 내 스무 살 무렵이 떠올랐다. 대학 졸업 후 내디딘 세상으로의 첫발힘겹기만 했었다. 때마침 시골 부모님은 논밭과 집까지 넘기고 쫓기듯 서울로 올라오셨다. 서울 변두리 단칸 월세방에서의 동거는 암울했고, 어느 날 날아든 입영 통지서는 구원의 쪽지처럼 반가웠었다.


진퇴가 모두 어렵다. 그렇지만 경험은 내게 좋은 스승이다. 능선 아래에 임도가 있고 방향에 대한 확신도 있다. 그 방향을 따라 경사의 가파름, 발목을 잡는 넝쿨, 잔뜩 습기를 머금어 미끄러운 바윗돌 이런 장애물만 염두에 두고 나아가면 될 터이다.


산행처럼 인생에 있어서도 경험이 있으면 실패를 줄일 수 있고 잘못 어긋나는 일을 피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불가능한 일은 일찌감치 쉽게 체념해 버리는 것이 익숙해졌다. 아집과 욕심에 목메지 않고 내려놓을 줄 아는 것도 경험을 통해서 체득한 지혜 가운데 하나다.


인천 상륙 작전하듯 이름을 알 수 없는 그 봉우리에서 지나온 임도의 중간지점쯤을 목표로 잡고 치고 나아갔다. 숲을 가로질러 빼곡히 앞을 가리고 낮게 자란 잡목을 헤치고 바닥을 뒤덮은 넝쿨을 밟고 넘으며 경사진 능선을 내려갔다.


이쪽과 저쪽의 능선 사면이 서로 맞닿은 계곡이 나왔다. 좁은 그 계곡을 따라 앞을 가로막는 험한 바위와 가파른 사면을 피해 가며 고도를 낮추며 나아갔다. 얏호! 한참 동안의 씨름 끝에 저 아래 계곡 위로 지나왔던 임도에 놓인 다리가 나타났다. 미로처럼 깊고 어둡고 좁은 계곡, 땀에 흥건히 젖은 몸과 물에 헹군 듯 젖은 옷을 그 계곡 물에 담근 후에 탈출하듯 임도로 빠져나왔다.


워터피아에서 즐거워할 아이들처럼 나도 내 유토피아를 찾아 나섰던 길. 준비 없이 감행한 설악산 자락 죽변봉을 찾아 나섰던 산행은 죽변봉 변죽만 힘겹게 헤매다가 말았다. 지나온 곳을 돌아보니 설악 능선 마루가 비를 잔뜩 머금은 구름에 가려 모습을 감추었다. 몸을 동해 해변 쪽으로 틀었다. 멀리 동해 바다에는 지칠 줄 모르는 동심처럼 한낮의 태양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마치 내가 찾아 나섰던 유토피아처럼.

그해 여름 La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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