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디어의 주인

연구 아이디어 도둑 사건

by 라온재

그날도 그랬다.


학회 참석 전날 저녁, 낯선 도시의 허름한 중국집에서 오랫만에 만나는 연구자들과 라운드 테이블에 앉았다.

메뉴는 짜장면, 탕수육, 그리고 가벼운 연구 이야기.

나는 평소 말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어쩌다 분위기에 휘말려 버렸다.

옆자리 박 박사가 “요즘 뭐 연구해요?”라고 물었고, 나도 모르게 입이 먼저 반응했다.

“사실 말이죠… 정신과 입원 환자들의 장기 약물 복용과 자해 시도와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를 구상 중인데요.

특정 약물 투여 전후나 격리 상태에 따라 자해 시도 관련성이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요?

뇌분비 호르몬의 경로랑도 연결될 수 있고요.”


박 박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한 척 탕수육을 입에 넣더니,

“오, 그거 재미 있는 연구감인데요?” 하고 웃었다.

나도 기분 좋게 웃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대화가 나의 ‘연구 아이디어 도둑 사건’의 서막이 될 줄은 몰랐다.


그리고 2년 후, 다시 학회, 이번엔 호텔 컨퍼런스룸이었다.

잠시 휴식 시간, 음료수와 간식을 접시에 담고 있는데,

다음 세션 안내 스크린에선 웬일인지 낯익은 연구 제목이 발표 목록에 올라와 있었다.

“장기 약물 복용 정신질환자의 자해 시도와 뇌분비 호르몬의 상관성 분석.”

발표자는… 바로 박 박사였다.

“어… 어라?” 나는 눈을 비볐다.

발표를 듣고 있자니, 연구의 시작 배경, 문제 제기,

심지어 연구 방법까지 내가 식탁 위에서 말했던 내용과 거의 같았다.

그 자리에서 먹은 탕수육 대신 나의 자존심이 목에 걸렸다.


과학계에서는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난다.

아이디어는 찰나의 바람처럼 흐르고, 누가 먼저 연구로 구체화하느냐에 따라 주인이 바뀐다.

정식 논문이 되어 발표되거나 특허로 등록되지 않은 이상,

아이디어는 소유권을 주장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남의 아이디어를 본인 것처럼 가져가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아이디어는 지식의 씨앗이다.

누군가 머릿속에서 오랜 시간의 사고와 관련 논문을 찾아 리뷰하고,

타당성을 검토한 후에야 연구 계획서로 꺼내 놓는 것이다.

그것을 우연히 접한 횡재로 여기고 낚아채 연구비를 타내는 일은,

비유하자면 누군가의 정원을 무단으로 파헤쳐 자기 화분에 옮긴 꽃과 같다.

꽃이 피더라도, 그 향기는 원래 씨앗을 뿌린이의 것이 아닌가?.


이후 나는 크게 배웠다.

학회든 회식 자리든, 새로운 아이디어는 절대 가볍게 말하지 않기로.

공유가 필요하다면 최소한 이메일로 흔적을 남기고,

중요한 아이디어는 비공개 연구노트에 기록 한다.

물론 농담 섞인 말이지만,

요즘은 “이 아이디어 빼끼면 너 바로 저작권 침해야” 하고 미리 경고를 날린다.

이 정도면, 상대도 경계를 느낀다.


내가 그날 식탁에서 말했던 것은 단순한 생각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개월 간 머릿속을 맴돌던 연구의 시작이었고, 내 시간과 열정의 흔적이었다.

그걸 자랑스레 떠들어댄 내가 어리석었고, 낚아챈 그가 부끄러웠다.


이후로 나는 연구 아이디어를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대신 식사 자리에선 차라리 최근 본 영화 이야기나 여행 경험을 이야기한다.

어차피 새로운 아이디어보다 여행 얘기가 더 재미있다.

그리고 다시 누군가가 내게 “요즘 뭐 연구해요?”라고 물으면, 이렇게 답한다.


“아직 설익은 아이디어라 아직 공개하기엔 부끄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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