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공의 하루

by 라온재


햇살 좋은 아침, 나는 조용히 주머니에서 꺼내져 티 위에 올려진다. 사람들은 나를 골프공이라 부르지만, 사실 나는 작은 구체의 철학자다. 오늘은 어떤 인생을 굴러가게 될지, 누군가의 희비를 어떻게 가를지 이미 알고 있는 듯한 기분으로 자리를 잡는다.


하지만… 드라이버가 다가온다. 커다란 헤드, 무시무시한 스윙 소리. 솔직히 말해서 맞을 때 꽤 아프다. 가끔은 정통으로 맞아서 시원하게 날아가지만, 어떤 날은 억울하게 토우(끝)나 힐(안쪽)에 비껴 맞아 찌그러진 자존심을 안고 휘청인다.


슬라이스는 내 잘못이 아니다


오늘 첫 번째 주인, 거칠게 휘두른다. 아뿔싸, 오른쪽으로 휘어진다. 슬라이스다. 나는 원치도 않았던 해저드를 향해 우아하지 않게 회전하며 떨어진다. 물속에 빠지는 순간, 한숨을 쉰다. 그건 내 잘못이 아니야.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린다. 하지만 주인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나를 향한 관심은 순식간에 끊긴다. 곧바로 새 공이 꺼내진다. 나의 짧은 무대는 그렇게 막을 내린다.


캐디는 내 편이다


가끔 나를 다시 찾아주는 사람이 있다. 바로 캐디다. 흙과 잔디, 물기까지 묻어있는 내 얼굴을 정성스럽게 닦아준다. 부드러운 타월로 나를 감싸 안으며 속삭이듯 말한다. 이번엔 잘 가자. 캐디의 손길은 마치 엄마 같다. 드라이버에게 얻어맞은 억울함도, 해저드에 빠진 서러움도 잠시 잊게 해준다. 나는 깨끗해진 몸으로 다시 라운드에 나설 준비를 한다.


페어웨이의 품격


드물지만, 정말 운 좋은 날엔 나를 제대로 아는 주인을 만난다. 휘두를 때도, 내려칠 때도 조심스럽다. 임팩트는 정확하고 강하면서도 부드럽다. 나는 곧장 페어웨이 위로 사뿐히 날아가고, 착지하는 순간 잔디가 포근하게 나를 맞이한다.


그 후엔 데굴데굴 구르며 햇살을 머금는다. 사람들은 ‘좋은 샷’이라고 외치고, 주인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이런 순간이 바로 내가 골프공으로 태어난 이유다.


세컨드 샷, 어프로치, 그리고 마침내 퍼팅. 그린 위는 나에게 무대와 같다. 미세한 경사, 바람의 숨결, 주인의 집중력. 모든 것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질 때, 나는 조용히 홀컵으로 빨려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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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리는 내 하루를 완성하는 작은 박수다.

하지만 모든 공이 그런 대접을 받는 건 아니다. 숲 속에 처박힌 채 잊혀지고, 오비 라인을 넘어가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동료들도 많다. 그들의 이야기는 라커룸에도, 스코어카드에도 남지 않는다.

나는 그걸 알기에, 오늘도 주어진 기회에 최선을 다해 구른다. 슬라이스도, 해저드도, 캐디의 손길도 모두 내 삶의 일부다.


골프공이 말하는 인생


사실 골프공으로 사는 건 인생을 닮았다. 맞고, 굴러가고, 때론 날아가고, 때론 빠진다. 하지만 결국 누군가의 웃음 속에서 의미를 찾는다. 내일 또 다른 주머니 속에서, 새로운 라운딩이 나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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