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입성기

by 라온재

2025년의 끝과 2026년의 시작은 바다 위에서 흘러갔다. 11월과 12월, 지중해를 건너 대서양을 지나 카리브해에 머물렀다. 크루즈 위에서의 시간은 시계가 느리게 가는 세계였다. 파도는 매일 같은 리듬으로 부서졌고, 일정표는 있어도 서두를 이유는 없었다. 마지막 크루즈가 1월 초까지 이어졌고, 그때까지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상태로 떠 있었다.


1월 12일 오더를 받았다. 바다에서 육지로, 여행자에서 군무원으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출발부터 순탄치 않았다. 무슨 이유인지 비행기 일정이 계속 꼬였고, 몇 번이나 갈아타며 거의 26시간을 공중에서 보냈다. 피곤은 점점 무게를 얻었고, 머릿속은 이미 비어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슈투트가르트는 소문대로 흐렸고, 차갑고, 어딘가 눅눅했다. 독일의 첫인상은 환대보다는 무표정에 가까웠다.


다행히 같은 미군 병원에서 일하는 동료가 공항으로 마중을 나와 있었다. 말 한마디 건네는 것만으로도 긴장이 풀렸다. 숙소는 부대 안 미군 호텔이었다. 체크인과 함께 병원 직원들이 준비한 생존 키트를 받았다. 물, 간식, 크림, 변환 플러그까지. 처음 온 사람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이곳의 직원들은 이미 몸으로 알고 있었다. 그 배려가 유난히 따뜻하게 느껴졌다.


도착 다음 날은 쉬라는 연락을 받았다. 몸은 쉬었지만 시차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낯선 침대에서 잠은 얕았고, 새벽마다 눈이 떠졌다. 그래도 꼭 필요한 행정은 시작됐다. 신분증 카드. 이 카드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출입도, 업무도, 일상도 멈춘다. 다행히 무사히 발급을 받았고, 독일 운전면허도 받았다. 그제야 독일 생활의 문이 아주 조금 열렸다.


며칠 뒤 처음 병원에 갔다. 캠프와 캠프 사이를 오가는 통근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병원은 예상보다 세련되 보였다. 환영은 과하지 않았지만 충분했다. 이곳은 군인과 민간인이 함께 일하는 공간이다. 현역 군인, 장교, 의무병, 그리고 나 같은 민간인 간호사들이 섞여 있었다. 군대의 질서 위에 병원의 시스템이 얹혀 있는 느낌이었다.


둘째 날에는 차를 렌트했다. 차가 생기자 생활 반경이 넓어졌다. 부대 안 그로서리에서 삼겹살과 라면 그리고 고추장까지 샀다. 채소 코너에는 배추가 보였다. 김치를 담글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매우 만족스러웠다. 한 두달 가량은 호텔 생횔을 해야한다. 간이 부엌이 있어 버티고 있지만, 집을 구하는 일이 가장 급하다. 집을 구하고, 짐을 받고, 차를 인수해야 비로소 루틴이 돌아온다.


병원 일은 당분간 시작하지 않는다. 한 달 가까이 교육과 인프로세싱이 이어질 예정이다. 컴퓨터 교육, 행정 교육, 규정 숙지. 일보다 준비가 먼저다. 다행히 사람들은 생각보다 우호적이다. 민간인들 사이의 분위기는 특히 그렇다. 군인은 군인끼리, 민간인은 민간인끼리 자연스럽게 나뉘는 공기도 느껴진다. 이곳이 군의 커맨드 아래 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한다.


생활 공간으로서의 부대는 예상보다 만족스러웠다. 호텔은 물론이고, 아침 5시부터 문을 여는 대형 피트니스 센터가 있다. 운동 시설은 잘 갖춰져 있고, 대부분 무료다. 커미서리는 한국으로 치면 대형 마트에 가깝고, PX, 즉 익스체인지에서는 전자제품과 생활용품을 면세로 살 수 있다. 가장 신기한 것은 커피, 술, 담배 쿠폰을 받았다. 모두 세금이 상당한 것들이다. 매월 일정량을 살 수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쓰는지 배워야한다. 주유소, 주거지, 각종 편의시설까지 둘러보니 독일 땅 위에 작은 미국 사회가 옮겨져 있는 듯했다.


아직 모든 시설을 다 이용해보진 못했다. 골프장도, 볼링장도 다음 주말쯤 하나씩 가볼 생각이다.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삶의 질은 크게 달라질 것 같다. 독일이라는 낯선 나라에서, 미군 부대라는 보호막 안에서 누리는 혜택들. 이중적인 구조가 서서히 체감되고 있다.


아직은 시작 단계다. 피로가 완전히 가시지 않았고, 모든 것이 임시적이다. 그럼에도 건강하게 도착했고, 큰 문제 없이 적응 중이다. 독일 입성은 화려하지 않았지만 무사했다. 이제 천천히, 이 낯선 땅에서 나만의 일상과 속도를 만들어갈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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