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자와 함께하는 말랑말랑 유럽여행 3] 마침내 출발!
날마다 할 일이 어찌나 많은지, 시간은 어쩜 이리도 빨리 지나가 버리는지. 아무리 애를 써도 하루는 짧기만 하구나. 읽고 쓰기를 거르는 날이 하루도 없단다. 나는 간절히 성장과 발전을 바라고 있어. 평온한 마음으로 끈기를 가지고 해나가다 보면 좋은 결과가 있겠지.”
- 1877년 6월 12일, 암스테르담에서, 고흐가 테오에게
있던 곳을 떠나는 일은 언제나 부산스럽다. 이렇게 한번 잠시라도 자리를 비울라치면 여기저기 챙겨두어야 할 것들이 어찌나 많은지, 마치 내가 이곳을 떠나면 세상이 멈춰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내 자리가 커 보인다. 하지만 늘상 그 생각은 여지없이 부서지곤 한다. 나 없이도 세상은 유유히 잘도 흘러가고 염려했던 일들은 기우였음을 돌아와 매번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세상이 멈추지 않도록 단속을 단단히 해 두고 떠날 참이었다. 전날까지도 마지막 어수선한 업무 처리로 밖에서 시간을 보내고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 집에 들어가 가방을 꾸릴 수 있었다. 조금 긴 여행이라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싶은 마음이었다. 두고 갈 세상이 걱정이지, 맞이할 새로운 세상까지 당장에 걱정할 여유가 없었다.
여행 가방을 꾸리다 보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 “당신의 여행 가방을 열어 보여 주시오.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내가 말해 주겠소.” 정도 되려나. 해가 지나면서 조금씩 달라지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여전히 자신을 알아가는 긴 여행의 중간 어드메쯤을 서성이고 있는 셈인지 모른다. 분명한 건, 세월이 갈수록 채비가 단순해진다는 것. 내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조금씩 깨닫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밤새 비가 쏟아져 내리는 통에 걱정이 많았다. 새벽 4시 반쯤 집을 나서는데도 좀처럼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빗줄기를 가르며 달리는 내내 비행기가 뜰 수 있을까 염려가 되었다. 미리 예약해 둔 주차장에 도착하니 5시 반.
체크인 수속은 미리 휴대폰 앱으로 해 두었다. 빨간색, 까만색 그리고 조금 작은 파란색 캐리어까지 세 개를 수하물로 보냈다. 간단히 요기할 만한 간편식, 두툼한 겨울 외투들, 그리고 내 책들이 들어 있는 무거운 가방이다. 노트북과 다이어리, 비행기에서 읽을 책 등이 들어 있는 서류 가방과 백팩은 각자 하나씩 기내용으로 챙겼다.
보딩 게이트 33번 앞. 이제 곧 탑승이다. 정말 떠나는가 싶다. 희미한 불안감, 얄프레한 설렘, 약간의 피로감, 정리되지 않은 일상의 어수선함을 뒤로하고 이제 정말 유럽으로 떠난다.
에어비앤비로 예약해 둔 우리의 유럽 집들이 잘 있어야 할 텐데, 유레일이랑 유로스타랑 탈리스랑 떼제베랑, 그 많은 기차와 버스들이 제시간에 잘 움직여 주어야 할 텐데, 이 많은 짐을 이고 지고 다녀야 할 우리, 지치지 말아야 할 텐데, 아프지 말아야 할텐데...
얼핏 잠이 들었다 깨어 보니 터키 상공을 날고 있다. 다시 또 슬며시 잠들었다 깨어나니 어느새 폴란드 땅이다. 바르샤바 프레데릭 쇼팽 공항(Warsaw Frederic Chopin Airport). 공항 이름이 쇼팽이라니! 너무 낭만적인 것 아닌가. 야상곡처럼 마침 촉촉하니 비도 내리는데, 저녁 어스름도 살짜기 내려앉고 있는데.
공항은 비교적 한산했다.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촉촉하니 비가 내리고, 낯선 도시의 저녁 어스름이 살며시 내려앉고 있었다. 기념품을 파는 알록달록한 상점들, 깔끔한 작은 식당과 편의점들이 늘어선 모습은 여느 공항에서 흔히 마주하는 풍경이다. 그닥 넓지 않은 공간에 서점이 여럿 있어 아름다웠다.
공항 안내판도 마침 온통 맘 설레게 하는 오렌지색, 그 위엔 춤추듯 가득한 온갖 낯선 기호들. 암호 같은 문자가 가득한 서점 진열대에 둘러싸여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자꾸만 웃음이 배시시 새어 나온다. 와인을 한 병 샀다. 브뤼셀 호텔에 도착하면 유럽의 첫 밤을 기념해야지.
LO233. 바르샤바를 떠나 브뤼셀로 날아가는 중이다. 오후 5시쯤 출발해 이제 저녁 7시로 향하고 있다. 공항에서도 지금 이 작은 비행기에도 어쩐 일인지 승객이 거의 다 백인 남성뿐이다. 낯설고도 이상한 풍경. 마치 가상의 공간으로 이동하는 영화 세트장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기장의 안내 방송이 나온다. 곧 착륙할 예정이니 안전벨트를 매란다. 기내 조명도 모두 다 소등되었다. 바깥은 이미 깜깜한 한밤중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저 아래 세상이 멀고도 멀다.
이제 잠시 후면 벨기에 브뤼셀이다. 고흐를 따라가는 이번 여행의 첫 도시. 작은 모험 같은 우리의 이 여행이 진정 시작되는구나 싶다. 마음이 간질간질하다. 가슴이 몽글몽글 작은 설렘으로 차오른다. 안녕, 브뤼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