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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드리햇반 Nov 15. 2023

빈센트 반 고흐의 고향, 네덜란드 준데르트 가는 길

인문예술기행/유럽기차여행/네덜란드 준데르트  

이제 막 제벤베르헨을 지나는 중입니다.
이곳으로 저를 데려다 주셨던 날이 생각이 나요.
젖은 길 위로 아버지의 마차가 아스라이 멀어져가는 것을 바라보던 기억...

- 1876년 4월, 고흐가 부모에게 쓴 편지 중에서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는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준데르트(Zundert)에서 태어났다. 준데르트는 벨기에 국경 근처 브라반트 지방 북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주민 수가 백여 명밖에 되지 않는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카톨릭 신자가 대부분인 지역이었지만 고흐의 아버지 테오도뤼스 반 고흐(1822~1885)는 개신교 교회 목사였다. 가문 대대로 목사 집안이었다. 어머니 안나 반 고흐-카르벤투스(1819-1907)는 헤이그에서 서점을 운영하던 중산층 집안 출신 여성이었다. 고흐는 어머니에게서 자연을 사랑하고 독서와 예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고흐 가족은 작은 목사관에 살았고, 부친은 마을 교회에서 설교를 했다. 그의 설교는 가난한 농부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목사관에는 하녀와 요리사, 정원사, 가정교사까지 고용되어 있었을 만큼 안정적인 삶이었지만 고흐 집안은 검약하고 절제된 생활을 했다. 부모는 교육에 관심이 깊고 엄격한 편이었다.  



집 건너편에는 마을 학교가 있었다. 7세가 되어 고흐는 이 학교에 입학한다. 하지만 아이가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고 생각한 부모는 11세 어린 고흐를 인근 도시 제벤베르헨 기숙학교로 보낸다. 25km 떨어진 곳이었다. 마침 신교도 가정의 자녀를 교육하기 위한 기숙 사립학교가 새로 설립되어 문을 연 터였다.


재학생 30명 중 빈센트는 가장 어린 나이였다. 10월의 어느 비 내리는 날, 학교에 도착한 어린 고흐는 부모가 타고 떠나는 노란 마차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평생토록 채워지지 않았을 허전함과 상실감의 시작이 이런 순간에서가 아니었을까.


13세에는 40km 거리 탈뷔르흐의 중학교에 진학한다. 개교 첫 해 신입생으로 선발된 학생 중 하나였다. 고흐는 친구네 집에서 하숙을 하며 방학이면 준데르트의 집으로 갔다. 탈뷔르흐에서 준데르트 집에까지 가려면 먼저 브레다까지 20km를 기차로 달리고, 브레다에서 준데르트까지 다시 20km를 마차로 가야 했다.



준데르트를 찾아가는 일은 그때나 지금이나 수월한 일은 아니다. 전날 밤 이리저리 찾아보니, 브뤼셀에서 브레다까지는 유레일로 일단 가고, 브레다 역에서 준데르트 행 버스 티켓을 구매해야 하는 모양이다. 1인당 편도 4.5유로. 왕복 8.5유로. 둘이 16유로 정도 되는 모양이다.


다소 무리해서 잡은 일정이라 혹시라도 배차 간격이 맞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이 앞섰다. 세상일이 늘 그렇듯, 실제로 맞닥뜨려 보니 큰일은 아니었지만, 어찌 되었든 벨기에 땅에서 네덜란드 땅으로 국경을 넘어 수십 키로 거리를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며 이동을 해야 하는 만만치 않은 상황이었다.


브뤼셀 중앙역에서 9시 50분 IC9226 기차를 타고 11시 18분에 브레다에 내린다. 브레다역에서 준데르트 행 11시 48분 버스를 탄다. 그렇게 한 40여 분 달리면 12시 30분쯤 목적지에 도착한다. 반나절 정도 동네와 생가와 미술관 등을 살펴보고 너무 밤늦은 시간이 되지 않도록 다시 거슬러 국경을 넘어 브뤼셀로 돌아오는 것이 오늘의 미션이다.


밤사이 비가 내려 촉촉하니 젖어 있는 돌바닥이 이국의 정취를 더한다. 숙소에서 중앙역까지는 걸어서 갈만한 거리다. 기차에 몸을 싣고 자리를 잡고 앉으니 안도감과 설렘이 슬며시 스며든다. 고흐도 이렇게 수도 없이 기차에 몸을 싣고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낯선 도시로 옮겨가곤 했을 것이 아닌가.



브레다는 기대했던 것보다 더 예쁘고 아담한 도시였다. 역사 뒤에 가만히 흐르는 작은 강과 하천, 그 곁에 나란히 늘어선 나무와 건물들, 다정하게 어우러진 모습이 아름답고 평화롭다. 길 위의 사람들도 하나같이 친절했다.


커피 한 잔을 무료로 건네주던 마트 직원 아가씨, 정류장 가는 길 안내를 열정적으로 해 주던 매표소 중년 여성 직원. 버스 타는 곳 위치를 열정적으로 알려주던 동네 아저씨, 장애인 승객을 섬세하게 배려해 직접 태우고 내려주던 기사 아저씨.


종이로 된 빨간색 버스카드와 거스름돈으로 건네받은 동전을 손에 꼭 쥐고, 알려준 대로 홀을 따라 쭉 가다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한 층 위로 올라간다. 지상층으로 나오니 버스 정류장이다. 알파벳 A부터 쭉 늘어서 있는 표지판을 올려다보며 서성이고 있는데 지나가던 멋쟁이 아저씨가 준데르트를 가려면 F로 가라고 알려준다.


"아, 베, 쎄, 떼..." 불어로 또박또박 불러주며 저기 멀리 F를 가리킨다. 지금 우리는 A 구역. 씩씩한 미소로 감사 인사를 건네고 부지런히 뛰었다. 버스 승하차장 F, 전광판에 반짝이는 글자가 이렇게도 반가울 수가! Zundert(준데르트)!



드넓은 시골길을 찬바람을 가르며 달린다. 지금이야 이렇게 버스가 다니지만 고흐가 살던 그 시절엔 마차로 달려야 했다. 마차가 마중을 나오지 않는 날은 이 길을 하염없이 홀로 걷곤 했다. 3시간을 걸으면 준데르트다.


반고흐 미술관 연구진들이 전하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한번은 무거운 짐을 들고 걸어가는 고흐에게 아버지의 친구가 짐을 드는 걸 도와주겠다 했다고 한다. 어린 고흐의 대답이 걸작이다.


"아닙니다. 당연히 제가 들어야지요. 누구나 다 자기 짐은 자기가 져야 하는 법이니까요."  

그렇지. 삶이라는 것이 결국은,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짐을 짊어지고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오롯이 걸어가는 것, 그것이 전부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그래도 아직 열세 살 어린아이일 뿐인데. 종종 너무 일찍 철들어 버린 아이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무거운 가방 짊어지고 집으로 가는 이 길을 홀로 걸었을 어린 고흐의 발걸음을 상상해 본다. 창밖의 풍경이 점점 더 논과 밭, 들판으로 가득차는가 싶더니, 이제 저기 앞에 잠시 후면 준데르트다. 빈센트 반 고흐의 고향. 그가 평생을 그리워했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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