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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환 Feb 20. 2022

리흐테르, 회고담과 음악수첩 -1

브뤼노 몽생종 저

<리흐테르, 회고록과 음악수첩>

:2부작 서평입니다.


근 1년 조금 안되는 긴 시간을 잡고 읽어낸 책이다.


세대를 잇는 예술가

  책의 구성은 전 세기 거장 중 한명인 러시아 출신의 피아니스트 스비야토슬라프 리흐테르 (누군가에게는 “리히터” 라는 이름이 더 친숙할지도 모르겠다) 의 평생동안 간직해온 음악적 자료와 예술수첩으로 되어있다. 1부는 그의 음악적 인생을 담은 일기, 2부는 오롯이 그의 음악 감상을 짧은 문단 문단으로 담은 음악수첩으로 구성된다. 광기어린 집착증의 천재 예술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세상에 단 한권밖에 없는 책이다. (아닌게 아니라, 리흐테르가 완강하게 모든 종류의 인터뷰를 거절한 탓에 브뤼노 몽생종이 쓴 책 이외에 다른 책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리흐테르에 관한 책인만큼 그에 삶에 대한 이야기를 심도깊게 다룬 것이 흥미롭기 그지없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책에 언급되는 동시대 타 예술가들에 대한 그의 관점과 입맛 (artistic taste)에서 더 많은 것을 얻어갈 수 있었다. 제일가는 피아니스트의 명성에 걸맞게, 리흐테르는 오이스트라흐(vn), 로스트로포비치(vc), 길렐스(pf), 굴드(pf),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vo) 등의 연주자들과 여러 공연에 걸쳐 협연했고, 카라얀, 데소미에르, 불레즈, 에셴바흐 등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회자되는 전설적인 지휘자들과도 활발히 교류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작곡가 프로코피예프와 쇼스타코비치같은 경우 그와는 거의 동년배에 가까운 친구였다. 그런 인연으로 그들에게서 소나타(리흐테르에게 헌정된 프로코피예프의 6번 소나타가 대표적이다)와 협주곡 초연을 부탁받는 일 또한 아주 잦았다고 한다. 예술적인 과도기의 정점에 서있었던 연주자였기 때문에 현대인의 시각에서 보기에는 다소 기괴할 정도로 구시대와 현시대의 음악을 동시에 향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왼쪽부터 차례로 피에르 불레즈,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 쇼스타코비치와 오이스트라흐를 만나는 리흐테르
리흐테르에게 헌정된 프로코피예프 <9번 소나타> 초안, 카라얀과 리흐테르

  

  그런 과정 속에서 그는 협연을 했든, 스쳐지나가면서 마주쳤든, 관객의 입장에서 연주회에 참여했든 간에 다양한 아티스트들을 고루 조명하며 비평하는데, 개중에는 차마 어디에도 담을 수 없는 끔찍한 혹평 또한 책에 그대로 언급됨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21세기의 전설적인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라고 리흐테르만의 그러한 관례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리흐테르는 본인이 모스크바에서 연주했던 베토벤의『3중 협주곡』을 회고하며 그를 두고


“카라얀은 이 작품을 피상적이고 명백하게 잘못된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중략) 그건 자신을 높이기 위한 거드름이었다”


라며 꽤나 분노에 찬 목소리로 평가하기도 한다.


이처럼 그가 제시하는 가식없는 비평을 통해 평소에 이미 검증받은 예술가라는 이유로 아무런 비판 없이 수용했던 여러 음악가들의 기량을 재평가할 수 있었다. 정상급 연주자에 대한 혹평이나 명확한 소견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정상급 특정 연주자에 대한 과한 신격화가 이루어지는 것이고, 결국 왜 해당 연주자가 정상에 도달해 있는지에 대한 뚜렷한 이해나 인정 없이 공허한 박수갈채만 보내는 관객들이 속출하는 것이다. 이는 바람직하지 못한 방식의 클래식의 대중화와도 직결된다. 이런 내 우려에 부응하여 족히 만족할 만한 대답을 지니고 있는 책이었다.


시종일관 항상성을 고수하는 음악가


  한편 그의 간결한 예술관은 직접적으로 그의 인생관에서 묻어나오는데, 거기서 확고한 예술가로서의 아이덴티티를 확인할 수 있으나 군데군데 도무지 다른 방식으로 해석할 여지가 없는 오만함과 고집이 엿보인다. 리흐테르는 결코 모든 작품에서 역량을 차게 발휘하는 유연한 연주자는 아니다. 적어도 내가 평가하기에는 그렇다. 바흐와 베토벤, 모차르트와 하이든 등 일부 고전주의 작품들 그리고 라흐마니노프의 경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만의 독보적인 영역이 있는 반면에, 전반적인 쇼팽 레파토리 등 그 독특함이 오히려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곡들도 분명 있다. 그의 쇼팽 연주는 클래식 전공자인 지인 중에서 우리나라의 평범한 음대생 실력에도 못미친다는 평을 내리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엄밀하게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쇼팽 에튀드를 기준으로 말했을때, 전체적인 템포가 곡을 표현하기에는 너무 느리고, 호흡의 길이 조절을 잘 못하며 멜로디의 루바토 표현이 아쉽다. 그리고 오른손과 왼손의 밸런스가 무너져서 곡자체가 불안정하게 들리고, 템포에 계속 끌려다니는 느낌이다. 극적표현도 충분하지 못하고 파워감도 전체적으로 부족하다.”


 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이렇게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자명한 허점에 대한 당시 대중과 언론의 합치된 신랄한 비판에도 리흐테르는 개의치 않고 평생에 걸쳐 일관된 연주만을 보여줬다고 한다. 일말의 외부 개입 여지조차 허용하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멍청한 아집이 아닌 영리함과 예술적 안목에서 배어나오는 일관된 고집은 그를 한층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할 뿐이다. 더욱이 그 특유의 꽉막힘과 다소 상반되는 반권력적이고 더없이 유쾌한 그의 성격에 곁들여지는 짓궂은 유머감각은 종종 웃음을 띄게 한다. (그런데 당시 유명인들에 대한 러시아의 관리체제를 고려하면 이는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는 줄타기였다).


- 리흐테르의 모차르트, 하이든 곡에 대해 첨언하자면, 전성기 고전주의 음악 중 베토벤을 제외한 하이든이나 모차르트 같은 경우 한 작품 안에 그렇게 많은 성격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리흐테르는 얼핏 드러나는 작품상의 변화를 귀신같이 포착해서 자연스럽게 성격변화를 이끌어낸다. 아티큘레이션도 굉장히 아름답고 곡의 템포나 호흡도 좋다. 작품의 전반적 균형도 안정되어있고, 하이든의 주제동기 발전작업도 명시적으로 표현해준다. 그런 점에서 그가 탁월하다고 평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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