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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토로 Jun 07. 2021

수습과 탓

샘플 3-43

샘플3이 수요일에 퇴직 의사를, 내가 금요일에 퇴직 의사를 밝히고 조용한 주말이 지나갔다. 최악의 상황이자 최선의 상황에서 생일을 맞았다. 그래도 실로 오래간만에 속이 덜 시끄러운 주말이었다. 그래도 대표가 전화 한 통은 할 줄 알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월요일에 되었다. 출근은 했지만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하긴 그만둔다고 한 마당에 어쩌자고 말을 하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했다. 잠시 뒤 샘플3이 전화를 받으러 나갔다가 들어오더니 말했다.


"20분 내외로 대표님 오신답니다. 회의하시죠."


우리 일정을 확인하지도 않고, 중요하다면 중요한 회의를 두 사람이 쑥덕쑥덕하더니 무조건 잡아버렸다. 다른 일정 있다면서 나가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음에도 그들은 변한 것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대표가 도착했다.


네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나는 녹음을 켰다. 대표가 먼저 입을 뗐다.

지난주 운영위원회를 2번 거치면서 예상치 못하게 당혹스러웠고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사무실 내부적으로 부분 정리를 하고 좀 안정을 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했다. 다만 그 판단은 다른 사람이 개입되는 것이 편치 않아서라고 했다.


그리고 바로 나의 탓이 시작되었다. 대표 본인은 사안이 사안이라 상당히 조심스러웠고 아무한테도 발설을 안 했는데 내가 예상치 못하게 얘길 하는 바람에 새어나갔다는 것이다. 내가 이 말을 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궁금해하게 되었고, 그 때문에 20년 이상 된 조직이 무력하게 와해될 수 있다고 느꼈다고 했다. 와해는 둘째치고 자세하게 얘기하지도 않았는데 나는 이미 조직을 와해시킨 장본인이 되어 있었다.


대표는 그 일에 대해서 깊이 알고 싶지도 않고, 잘잘못을 판단하고 싶지도 않으며 괜히 개입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개인적인 갈등이 업무적으로 지장을 초래하는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라면서. 하지만 벌써 업무의 지장이 계속되어 왔고, 그 문제를 분명 대표에게도 말했으나 그건 벌써 잊은 모양이었다.

여전히 그 문제가 되었던 예산이 샘플3이 그만두는 것을 기준으로 작성되었다고 아주 잘못 이해하고 있었고, 개인적인 갈등을 슬기롭게 풀지 못해서 조직을 깨부셨다고 했다. 주말 내내 잠을 못 잤단다.


단 3분 정도 되는 시작의 말에 이미 나는 대역죄인이 되어 있었고 생각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대표의 이야기를 들은 동료가 말했다.


"저는 지난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랐어요. 아주 한참 뒤에 알았어요. 처음 듣고 나서 황당해서 뭘 어떻게 뭘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좀 그랬어요. "


내가 밖에 떠들고 다녀서 문제가 생겼다는 대표의 말에 반박한 것이었다. 그리고 샘플3이 우리와의 소통을 중단한 것과 대표가 샘플3의 퇴직을 말하면서 돈이 없어서 그만둔다는 것으로 몰아 영웅시 한 것이 잘못되었다고도 이야기했다.

내가 공간 분리 요청을 한 것 자체가 샘플3보고 그만두라고 한 것이 아니라 상황을 해결하기 위함이었는데, 재택은 일을 안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퇴직을 하겠다고 나선 샘플3은 왜 탓하지 않냐는 것이었다. 오죽 힘들었으면 상담센터 다녔겠냐면서 말이다. 내 대신 말해준 동료가 고마웠다. 대표의 여는 말을 듣고 난 뒤 황당해서 웃음이 마스크 너머로 웃음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고마운 마음을 갖기도 잠시. 대표는 예상에 벗어나지 않는 막말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볼 적에 두 사람 다 고집이 쎄고 그렇잖아요? 자기 생각에만 충실해서 소통이 안 되고 있어요. 일이 원활하게 돌아갈 수 없죠. 이게 개인적인 성향들이 있어서, 샘플3 못지않게 김토로도 분명히 그런 성향이 많아요. 아직은 사회경험이나 나이가 어려서 조금 유도리가 없다는 그런 생각도 할 수 있겠고."

"사회적인 책임이라는 건 내가 무슨 말을 한마디 내뱉었을 때 오는 파장하고 조직에 끼치는 영향을 다 고려해야 하는데 이유여하를 떠나서 금요일에 사전 조율되지 않은 얘기를 폭탄선언을 하신 부분에 대해서는 좀 경솔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랬다. 대표는 각자의 이야기를 듣고 조율하러 온 것이 아니라 나를 경질하러 온 것이었다.

고집이 세다는 것, 누가 한 표현인지 잘 알겠지만 인정한다 치자. 하지만 나이 서른넷에 이 바닥에서만 경력 12년 차가 사회경험이 적고 나이가 어려서 유도리가 없다는 말은 인정하기 어려웠다. 그게 문제라면 나보다 어린 나이에 리더를 시작해서 활동을 하고 있는 샘플3은 어떻게 믿으면서 일을 하는 것일까? 내가 입 다물고 있으면 샘플3은 문제가 없는 투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을까? 속된 말로 그의 병크가 여기서 끝이 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과연?

그리고 결국 내 탓이었다. 자신이 내게 입 다물라고 뱉은 말이나 행동들은 깊이 아주 깊이 생각하고 심사숙고하고 한 말이고, 내가 한 행동은 세상 경솔한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이유여하를 왜 떠나나. 그 이유여하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된 것이고, 이유여하를 빼놓으면 이런 대화를 할 필요도 없는 것인데.


시작부터 내 탓, 나의 잘못이라는 대표의 말을 듣고 있으니 결과는 물 보듯 뻔했다. 그래도 대화를 해보면 좀 달라지지 않을까 고민했던 내 자신을 살짝 원망했다. 아직도 기대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니 어리석었다. 무슨 말을 해도 퇴직 결정을 뒤집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대화에 임했다. 


내 다짐은 아주 유용했다. 아직 샘플3과 대표의 막돼먹은 말들이 한참 더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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