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그린 나이트(2021)
감독: 데이빗 로워리
출연: 데브 파텔, 알리시아 비칸데르, 조엘 에저튼, 사리타 초우드리, 랄프 이네슨, 케이트 딕키
러닝타임: 130분
국가: 아일랜드, 캐나다, 미국, 영국
* 이 리뷰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관람 후에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옛날 옛적에 말이지... 이런 일이 있었단다.' 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딱 기사라고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귀족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아서왕의 조카가 크리스마스 파티에 초대를 받는다. 아서왕과 여왕, 원탁의 기사들이 모인다. 아서왕은 평생에 조카를 자신의 옆에 앉힌 적이 없었으나 그날따라 누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조카를 옆으로 불렀다. 마녀라고 불리는 자신의 누이의 아들을 곁에 두기 부담스러웠으리라.
그리고 왕의 부부는 조카 가웨인을 부추긴다. 무릇 기사라면 무용담 하나쯤은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때 녹색 기사, 나무 기사가 나타난다. 아마도 어머니가 자식이 없는 왕의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만든 상황인 듯 하지만 그걸 아는 사람은 없는 것으로 보였다.
그 나무 기사는 가장 용맹한 자 앞으로 나와서 자신과 대결을 하라고 한다. 자신의 목을 베든 뺨에 상처를 내든 이기는 사람에게는 명예와 재물을 줄 것이나 대신 1년 뒤 북쪽의 예배당에 찾아와 똑같은 상처를 받을 것이라는 조건이었다. 가웨인은 아서왕은 그 성스러운 검을 하사 받고, 대결에 나섰다. 말리는 듯 말리지 않고 부추기는 아서왕 부부의 의중은 알 길이 없었다.
대결이 시작되었다. 자세를 잡는 가웨인가 달리 녹색의 기사는 자신의 도끼를 내려놓고 목을 내밀었다. 자존심을 지키고 목을 내리칠 것이냐, 1년 뒤를 생각해서 살짝 상처만 낼 것인가에 대한 결정은 가웨인에게 달려있었다. 자신에게 이렇게 관심이 쏠린 적이 있었던가... 그는 아서왕에게 빌린 칼을 크게 휘둘러 녹색 기사의 머리를 댕강 잘라버렸다. 가웨인의 승리였다. 하지만 잠시 뒤, 승리의 기쁨도 잠시. 목이 잘린 기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며 자신의 목을 가지고 떠났다.
약속이라는 게 이렇게나 피 말리는 일이었던가. 계절이 지나고 날이 지나고 그동안 술을 마시고 무용담도 아닌 무용담을 늘어놓고 소문의 주인공이 되어보았다. 그러나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수록 초조함은 늘어만 갔다. 아, 왜 목을 베었을까?
그리고 아서왕이 찾아온다. 그냥 게임일 뿐이라며 부추겼으면서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 한다면서 녹색 예배당을 찾아가라고 말이다. 가웨인은 안 가고 싶은 것이 분명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번에도 등 떠밀려 여행을 떠나게 된다. 엄마가 메고 있으면 꼭 돌아올 수 있다고 말해준 허리띠를 멘 채로.
여행이라고는 모험이라고는 떠나본 적 없는 그의 여행은 순탄치 않았다. 다섯 가지의 시련을 겪는다고 했다지만 실제로 시련이 맞는지 싶었다. 시련인지 아닌지 하는 것들을 지나오다 보니 사실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영웅담들은 MSG를 팍팍 섞은 것이었다는 슬슬 깨닫게 된다.
중간에는 이미 데드 엔딩이 나왔다. 이것저것 빼앗기고 묶인 채로 시간이 흘러 가웨인은 자연의 일부가 되었다. 뼈다귀가 되어서!
하지만 시간은 거슬러 간다. 옛날이야기를 해주는 그 누군가가 아직은 이야기를 끝낼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거슬러 올라간 가웨인은 방법을 찾아낸다. 그러고 보니 이 이야기는 누가 누구에게 해주는 이야기인 걸까? 분명 화자가 있었는데 그 화자가 누군지 알 길이 없다.
동행하던 이 여우가 가장 유력해 보이기는 하다. 여우의 정체도 궁금하지만 녹색 기사의 정체도 궁금하다. 여우가 녹색 기사는 가까운 사람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엄마나 아서왕이 아닐까 싶다가도, 가웨인의 숨겨진 여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뭐, 이런저런 시련을 겪은 가웨인은 결국 녹색 예배당을 찾았고, 기사를 만난다. 조금 일찍 도착하여서 자연치유 중인 그의 곁에서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린다. 잠에서 깨어난 녹색 기사는 가웨인에게 준 것을 그대로 받을 준비가 되었는지 묻는다. 용감하게 자신의 목을 내주려던(사실 아닌 것 같지만) 잠시의 시간을 달라고 하고 달아난다.
달아난 시간 속에서 가웨인은 미래를 맞이한다. 배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전쟁도 하고, 자식을 잃고, 결국 패배의 앞에서 죽음을 선택한다. 정신을 차린 가웨인은 도망가는 선택을 버리고 당당하게 목이 잘리는 엔딩을 선택한다. 아마도 자신의 용감한 모습에 녹색 기사가 감명을 받아서 살려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들어왔던 모든 영웅의 서사가 그리했듯 말이다.
하지만 자연은 약속을 지킨다. 가웨인이 선몽으로 미래를 본 것인지, 혹은 많은 것을 겪고 다시 과거로 돌아온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목을 자르면 목을 자르고, 작은 상처를 내면 상처를 낸 뒤 명예도 주고 친구도 되어주기로 했던 약속은 약속이었다. 엄청 자세하게 다 설명해 줬음에도 목을 딱! 내리친 가웨인이니 녹색 기사는 자비가 없었다. 그가 깨달음을 얻은 것? 그것은 약속과 별개의 문제다.
자연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고 있지만 지금 찾아온 위기처럼 자비롭지는 않다. 자연은 주는 대로 돌려준다. 지금 닥친 현실이 딱 그것을 대변하고 있지 않은가! 자연을 크게 훼손하고 다시 돌려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거나 약속하는 것은 지금의 우리 무두와 가웨인, 그리고 그 주변 사람들과 똑 닮아 있다. 그렇게 훼손했으면서 자연이 용서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도 매우 오만이다. 자연은 받은 그대로 돌려준다. 그게 자연의 섭리다.
흔한 영웅 서사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환경 영화였다. 그것으로 좋았다.
영웅의 이야기이면서 장르에 액션이 없는지도 명확한 영화다. 그렇기에 '기사'라는 이름에 현혹되어서 액션을 기대하고 가서 본다면 아주아주 실망할 수 있으므로 그러지 않길 바란다.
영상은 정말 대단하다. 막 화려하다고도 할 수 없고, 밋밋하다고도 할 수 없지만 빠져드는 색감을 가지고 있다. 숲의 색과 마을의 색이 참 곱게 느껴졌다. 그리고 배경 음악은 신의 한 수라고 볼 수 있었다. 배경 음악들은 <그린 나이트>의 세계관과 매우 잘 어울렸고, 상황에 딱 들어맞았다.
그러나 구성이 정신산만한 느낌이 있었다. 다섯 가지의 시련을 좀 더 친절하게 알려줬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색했을 때 나오는 영화의 설명이 사실 친절하지 않아서 영화를 한 번 본 것만으로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칭찬해 마다하지 않는 영상미와 음향(+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괜찮다고 소문난 원작)을 생각하면 조금은 더 친절해도 되지 않았을까?
배우 얘기를 조금 하면, 주연배우 '데브 파텔'은 정말 엄청 고생했겠다. 얼굴이 익숙해서 어디서 본 배우인가 했더니 <슬럼독 밀리네어리>에서 나온 배우였다. 다른 작품들도 많이 했는데 기억이 안 나니 임팩트 있는 작품은 이게 두 번째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놀랐던 배우는 '케이트 딕키'였다. 아서왕이 왕일 때 여왕의 역할을 맡았는데 암만해도 저렇게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익숙하다 못해 찰떡이어서, 보자마자 기시감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바로 떠오른 그 여인, '리사 아린'이었다. <왕좌의 게임>에서 미친 여자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 존 아린의 아내 그 리사 아린이 케이트 딕키였다. 곧 쓰러질 것 같은 얼굴에 중세시대의 의상은 그녀가 아서왕의 배우자인지 존 아린의 배우자인지 헛갈릴 정도였다. 혹시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왕좌의 게임> 인가 싶을 정도로. 그만큼 잠깐의 출연으로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물론 내가 <왕좌의 게임>을 본 탓일 수도 있지만.
롯데시네마에서 받은 티켓은 메가박스 오리지널 티켓을 벤치마킹한 것인지, <그린 나이트>에만 적용되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소장용 굿즈로는 안성맞춤이다. 티켓은 사진 말고 실물로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 리뷰는 씨네랩으로부터 시사회에 초청받아 관람한 후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