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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토로 Apr 25. 2021

엄마의 냉장고

그의 던전

이번 고향 방문의 목적 중 하나는 엄마의 냉장고를 정리하는 것이다.

엄마는 조금 남은 식재료나 남은 반찬을 우선 냉장고에 넣는 버릇이 있다. 때문에 냉장고는 늘 가득하다. 특히 작은 조각들은 고기들이 굉장히 많이 있다. 생각해보니 엄마는 우리가 어릴 때도 사온 고기를 전부 사용하지 않았다. 너무 많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다음에 고기를 먹을 땐 냉동된 고기는 맛이 없다며 새로 사 온 고기로 반찬을 해 주셨다. 우리야 늘 신선한 식재료로 요리된 것을 먹어서 좋았지만 남은 조각들을 받아 넣는 냉장고는 버거워했다.




엄마의 냉장고는 확실히 보물창고다. 갖가지 것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보물들이 썩어가고 있다. 냉동실이 만능이 아닌데, 엄마는 만능처럼 사용하고 있다. 사실 세상 많은 엄마들이 '냉동실에 두면 괜찮아'를 시전 하는 것을 보면 아마 엄마가 되면 자동으로 장착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이런 냉동고는 단박에 끝날 일이 아니라서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단 하루에 판도라의 상자를 열 수 없었다. 그래서 요번 공략은 냉장실이었다. 우선 문을 침략했다. 밖에서 작은 문을 열어서 물이나 음료를 꺼내먹을 수 있도록 되어 있는 창은 이미 못쓰게 된 지 오래였다. 이곳을 복원하는 것이 첫 번째 임무였다.


"엄마, 이거 버려도 돼?"

"엄마, 이건 버린다?"

"엄마, 이건 뭐야?"

. . .

"엄마, 어때?


"따라라닷단~ 따라라란~" 하며 러브하우스 노래를 흥얼거리며 엄마에게 복원된 냉장고의 일부를 보여줬지만 엄마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사실 엄마는 내가 엄마의 영역에 침범하는 것을 그닥 달가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나의 목적을 달성할 의무가 있었다. 

저녁을 먹은 뒤 아빠는 약을 드시며 물을 찾으셨고, 냉장고에 물이 있다는 말에 냉장고에는 넣을 곳이 없다고 바로 항변하셨다. 작은 문을 딸깍 열어 물의 위치를 알려드리자 "아하, 이렇게 쓰라고 되어 있는 곳이었구만!"이라고 말씀하시면 물을 들이키셨고, 그 말의 대가는 엄마의 따가운 눈총이었다.


냉장고에 물병 4개가 거뜬히 들어갈 수 있게 되자 엄마는 아침부터 물을 한 주전자 끓여놓으셨다. 그걸 식혀서 냉장고에 넣는 일은 내 몫이었다. 냉장고를 복원한 자로서 그 무게를 견디고 있었다.




일부를 복원한 것으로 끝낼 수는 없었다. 저녁때의 작업에 이어 아침부터 문을 전부 복원했다. 바로 이어서 진행하고 싶었지만 너무 힘들어서 잠깐 쉬고 있을 무렵 엄마가 왔다. 어떤 걸 버렸고, 어떤 걸 어떻게 정리했는지 브리핑하고 있었는데 엄마가 쓰레기봉투를 들썩들썩했다.


"이건, 버리지 마."

"이건, 왜 버려?"

"이건 그냥 버리지 말고 닭 줘(feat. 개 줘)."


그리고 나의 실수가 발견되었다. 오래되어 보이는 곶감을 먹을 수 없어 보이기에 버렸는데, 그건 외할아버지의 곶감이었다.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가 엮어주신 곶감을 엄마는 버리지 못하고 계셨던 것이다. 확실히 엄마의 냉장고였고, 보물창고라 주인 없을 때 정리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구나 오래된 카레가루도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가져다 주신 강황가루였다. 두 분 할아버지께 죄송하다고 마음 깊이 말씀드리고 엄마에게 나도 할아버지가 주신 삼백초환 아직도 냉장고에 있다고 이실직고한 뒤에 둘 다 현실로 복귀시켰다. 좀 더 잘 보관할 수 있도록 보관도 좋은 곳에 하고, 까먹지 않게 표시도 잘해뒀다.




잠깐의 휴식은 냉장고의 원 주인과의 소통으로 중단되고 이렇게 된 김에 계속 작업을 시작했다. 다음은 야채칸이라 불렸던 곳이다. 전부 꺼내 놓고 버릴 것, 닭 줄 것, 개 줄 것, 밖에 놓을 것, 안에 다시 넣어놓을 것으로 구분했다. 그리고 내부를 청소하려고 문을 꺼내는 순간 지옥을 선사받았다. 그동안 냉장고에서 있었던 온갖 사건 사고들을 모아서 맨 아래에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속으로 '닦아 질까?'. '닦아지기는 하는 걸까?'를 수십 번 외치며 작업을 시작했다. 우선 보관서랍, 받침대 등을 꺼내서 마당의 수도로 나가서 박박 닦아주고 데리고 들어와서 수건으로 물을 훔쳐줬다. 그리고 드디어 내부 작업에 돌입했다. 수세미와 행주를 따뜻한 물에 적셔 한번, 두 번, 세 번, 네 번을 작업했다. 왜 이렇게 오래 열어 놓느냐는 냉장고의 경고를 수십 번 무시하고 나서야 완료할 수 있었다. 물론 완전히 깨끗하지 않아서 완료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이 이상 하다가는 냉장고의 경고가 아니라 엄마의 경고를 받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마무리 작업을 하는 중에 엄마가 돌아왔다. 도대체 뭘 치운 거냐는 말에 순간 발끈했지만 그런 걸로 발끈할 순 없었다. 아직 메인은 시작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했지만 엄마는 내심 맘에 들어하는 눈치였고, 여기서 수틀리면 남은 냉장고와 대망의 냉동고는 시작도 못하게 된다. 잘 참았다.

암만 생각해도 남은 냉장실은 혼자서 불가능하다. 주인의 도움을 받아야 정리가 가능하다. 야채는 거의 들어 있지 않았던 야채칸에는 닭들의 간식이 가득했지만 남은 냉장실엔 아마 개들의 식사가 가득할 것이라 예상된다. 하지만 더 이상의 작업은 불가능이었다. 작업자인 내가 충전 불가한 방전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냉장실뿐 아니라 냉동실까지 작업하려면 힘을 비축해 둬야 한다.

특히 많은 식재료들을 '버릴 것'으로 분류하기 위해서는 엄마와의 기싸움도 해야 하기 때문에 마인드 컨트롤도 매우 필요하다. 나는 지 여사님을 설득할 수 있다. 있을 것이다. 있겠지..? 


고향에 있는 동안 엄마의 냉장고 중 1개를 전부 정리할 수 있을지 어떤 시련이 닥칠지 걱정은 되지만 그래도 또 어떤 추억들이 숨겨져 있을지 조금 기대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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