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ara Kim Feb 10. 2021

선생님의 유산

지켜봐 주는 선생님

"진아야. 불어 선생님이 식사하러 오셨다가 네 안부 물으시더라. 연락하라고 연락처 주고 가셨어." 


헉. 불어 선생님! 내가 졸졸 따라다녔던 바로 그 선생님! 졸업하고도 꼭 연락드리겠다고 걱정 마시라고 호언장담 했었다. 막상 대학에 가고 나선 대학 생활에 취해 일 년에 한 번 전화드릴 까말까 하다가 결국 선생님께서 날 먼저 찾게 만들고야 말았다. 선생님의 얼굴이 눈 앞에 스치며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졌다.


줄 세우기 교육 시절에 학창 시절을 보냈던 나는 초중학교 땐 날고 기며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나는 법도 기는 법도 잃어버렸다. 전교 일등, 반 일등을 휩쓸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공부 잘하는 학생 축에 속해 있던 나는 고등학교에서 치른 첫 중간고사에서  대략 난감한 점수를 받고야 말았다. 처음 받아본 적응되지 않는 성적표에 엄청난 충격과 함께 좌절했던 순간이었다. 


“아. 나는 망했구나. 이건 정말 회복불능이야....”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 생각과 함께 나를 더 힘들게 만든 것은 나라는 존재가 학교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학생이 됐다는 사실이었다. 1분이면 끝나는 ‘휘리릭 진학상담’을 받는 학생이 있는가 반면 10분, 20분이 지나도 교무실을 나오지 않는  ‘한 땀 한 땀 진학상담’을 받는 학생이 있었는데 나는 전자였다. 인생의 중요도가 성적 앞에 갈리는 것이 아닌 것을 알지만,  누구나 똑같이 중요한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도 알지만. 진학상담을 받았던 순간은 내 인생의 중요도가 낮아진 기분이었다. 순위권 안에 들지 않는 학생은 반을 빛내줄 수 없을뿐더러 장기적으로는 학교를 빛낼 수 없는 학생이니 굳이 심혈을 기울여 관리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부모 외엔 아무도 나에게 기대하지 않았고 나 또한 나에 대한 기대를 포기한 채 한참을 방황하며 고등학교 1년을 보냈다.




2학년이 되었다. 이렇게 자포자기로 살면 안 되겠다 싶어 정신을 차려보려 안간힘을 썼다. 그 시기에 나를 알아봐 주시는 선생님들 몇 분 계셨는데 그중에  양수경 선생님이 계셨다. 선생님은 불어를 가르치셨고 들리는 소문에는 엄격하기로 유명했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맨 앞자리에서 열심히 하려 애쓰는 나를 알아봐 주는 눈빛으로 날 쳐다보셨다.  그런 선생님이 좋았고, 잘 보이고 싶었다. 반의 불어 부장을 뽑는 날. 나는 손을 번쩍 들어하겠다고 했다. 선생님과 더 가까워지고 싶어서였다.  


불어 부장이 된 뒤 나는 매 수업 시간을 은근한 긴장감으로 임했다. ‘질문을 하시면 어쩌지? 아무도 대답을 안 하면 어쩌지?  나라도 해야 하는데’. 선생님의 질문에 침묵의 시간이 없도록 예습과 복습을 미리 해두었다. 시험기간엔 그 어떤 과목보다 불어공부를 열심히 했다. 주요 과목이라 할 수 있는 국영수를 시험 치는 날에도 불어공부를 했는데 주요 과목 공부를 못 해서 걱정이 되기보단 불어공부가 신이 나서 했던 기억이 난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무엇이 나를 그토록 긴장하고 열심히 하도록 만들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그동안 내가 잊고 있던 감각. 누군가 나에게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감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말이지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며 기대한다는 사실 자체가 좋았다.


불어 선생님은 나를 긴장시키고 열심히 하게 만드는 존재임과 동시에 동경을 심어주는 사람이기도 했다. 수업시간에 종종 당신의 대학생활과 프랑스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꿈처럼 들려주셨는데  그때마다 나는 내가 마치 그 장면 속에 있기라도 한 듯이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가며 이야기를 들었다. 불어과에는 남자보다 여자가 많은데 유독 멋쟁이들이 많다는 이야기.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기고 옷도 잘 입는 여자들이  모여있어 불어과 애들이 캠퍼스를 누비면 사람들이 쳐다볼 정도란 이야기. 하지만 매일 그렇게 옷에만 신경 쓰고 외모만 보살피면 안 된다는 이야기. 공부할 때는 공부를 해야 한단 이야기. 진정한 멋쟁이는 공부할 땐 공부에 집중하고 파티 같은 특별한 날에는 짠~하고 변신해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는 이야기. 프랑스 몽 마르뜨 언덕에 가면 그림 그리는 화가들이 늘어서 있는데 그곳에 있는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가 그렇게 맛있다는 이야기. 키도 크고 콧대도 높은 프랑스 여자들이 기다란 바게트를 옆구리에 끼고 걷는다는 이야기.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림을 그려가며 나도 언젠가 그 속에 있기를 바랐다. 아마 선생님이 심어준 로망 때문에 자연스레 불어를 전공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지도 모른다. 3학년이 되어선 불어과에 진학하는 것을 목표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불어가 나의 운명은 아니었지만 원하는 학교의 불어과에 가겠다는 의지로 수능이란 거사를 치러낼 수 있었다. 




대학에 진학해서는 선생님과의 거리가 자연스레 멀어졌다. 졸업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땐 선생님이 좋아하는 다크 초콜릿을 듬뿍 녹여 케이크를 구워가기도 하고, 추석, 설날, 크리스마스와 같은 때에 맞춰 안부인사를 전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것마저도 뜸해졌다. 마침내 나는 학교의 유학 프로그램으로 잠시 동안 외국에 나가 있었고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휴대폰 번호도 바뀌어버려 선생님과의 연락은 두절됐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취준생이 된 내가 백수생활을 하고 있을 무렵.  바로 그 어느 날. "진아야. 불어 선생님이 식사하러 오셨다가 네 안부 물으시더라. 연락하라고 연락처 주고 가셨어." 


아뿔싸! 실수다.

내가 먼저 했어야 했는데! 


죄송함에 조심스레, 정말 정말 조심스레 전활 걸었고 다행히 선생님은 서운해하거나 화가 난 기색 없이 잘 지냈냐며 언제 한번 만나자고 했다. 곧 있으면 프랑스 문화원에서 보졸레 누보 파티를 하는데 같이 가자고도 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선생님과 분위기 좋은 파티장에서의 데이트. 흥분되는 순간이었다. 그곳에서 내가 와인을 마셨던가? 긴장해서 못 마셨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신 자리를 같이 했던 사람들에게 나를 아끼는 제자라고, 훌륭한 제자라고 선생님이 소개했던 것은 기억난다.  제때 연락도 못 드리고 결국 선생님이 먼저 나를 찾게 만든 제자인데…... 게다가 난 취준생 백수인데 그런 나를 훌륭한 제자라고 소개하다니...  


파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선생님께서 알 수 없는 말을 하셨다. “네가 자리를 잡기 전까진 나의 책임은 끝나지 않은 거야. 네가 나 없이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으면 그땐 내가 없어도 돼.” 난 속으로 '아니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외쳤다. 그때 난 도무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다. 내가 자리 잡기 전까지 선생님의 책임이 끝나지 않은 거라고? 나를 책임지겠다는 말씀이 신건 가? 백수인 나에게 일자리를 알아봐 주시려 그러나?  어떻게? 그런데 왜?  맘 속으론 물음표 투성이었지만 겉으로는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그 말의 속 뜻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른 체,  선생님께 그런 말을 들었다는 사실 조차 잊어버린 채로 십 년이 지났다. 좌절감에 휩싸여 자포자기했던 고등학생의 모습, 대학에  가겠다는 막연한 목표로 수능 공부에 올인했던 고3 시절의 모습을 지나 음식과 문화 공부로  대학과 대학원 생활을 마친 지금은 농사와 요리, 지속 가능한 음식에 관심 있는 청소년들을 만나고 만들어내는 교육 일을 하고 있다. 

어느 날 내가 만나는 학생들에 대해 생각하다 선생님의 그때 그 말씀이 퍼뜩 떠올랐다. 


 “네가 자리를 잡기 전까진 나의 책임은 끝나지 않은 거야. 네가 나 없이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으면 그땐 내가 없어도 돼.” 


선생님의 말 뜻을 이해할 것 같았다. 이해할 수 있었다.  ‘다름 아닌 나를 지켜보겠다는 것이었구나. 내가 학교를 떠났어도 내가 어디 있든, 어디서 무얼 하든, 잘 지내는지, 밥 벌이는 잘하고 사는지, 사회에 첫 발은 잘 내딛는지, 힘들진 않은지 도와줄 것은 없는지. 지켜보겠다는 것이었구나. 울컥하고야 말았다. 그 시절의 나, 그리고 나와 같은 때를 지나가고 있는 나의 학생들을 생각하니 코끝이 찡해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난 정말 진짜 선생님을 만난 행운아구나. 선생님은 그렇게 제자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계셨던 거구나. 나의 이 행운을 내가 만나는 학생들에게도 나눠줘야겠다 다짐했다. 나도 나의 학생들을 지켜봐 주리라. 그들이 내 옆에 바로 있지 않아도. 그들이 어디 있든, 어디서 무얼 하든, 잘 지내는지, 밥 벌이는 잘하고 사는지, 사회에 첫 발은 잘 내딛는지, 도와줄 것은 없는지.  


선생님은 나를 지켜봐 주는 선생님이었고 그 덕에 나는 지금의 내가 되었다.. 지켜봐 주는 선생님.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 이것은 선생님이 내게 남긴 유산이며 누군가에게 또 물려주고 싶은 유산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