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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조성 강사 라라 Dec 20. 2019

01 나를 찾는 시작점

삶의 끝에서 다시 시작하다


 2009년 8월 22일 토요일 저녁.

 집에 도착하자마자 떨리는 손으로 오후에 정신과에서 받아온 한달치 약을 모두 입에 털어 넣었다. 오후에 병원에서 약을 받아 나올 때만 해도 죽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 집에 오는 길 토요일 저녁의 모든 풍경이 다 괜찮아 보였다. 이 평화로운 세상에 불행하고 우울한 나만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집에 도착할 즈음,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가족의 웃음소리와 저녁밥 짓는 냄새가 나는 여름밤의 더없는 평화로움 나는 그만 사라지는 게 좋겠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는구나...’ 외로움과 두려움에 눈물을 쏟으며, 미안하다는 말만 가득한 유서를 쓰다가 정신을 잃었다.

 ... 정신과에서 처방받은 약은 아무리 많이 먹어도 죽지 않는다는 걸 나만 몰랐던 건가. 다음날 오전, 약에 취해 정신은 없지만 나는 다시 깨어났고,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에 깊이 절망했다. 이미 1년 전부터 끊임없이 올라오는 자살충동은 그 날 이후로도 1년 넘게 계속되었다.


  우울에 대해 알려주는 그림책 ‘굿바이 블랙독’에서 우울을 온갖 종류의 ‘개’로 표현한다. 모양도 크기도 무게도 다른 개들처럼, 사람마다 상황마다 우울이 나타나는 증상은 많이 다르다. 그래서 우울을 경험했던 사람도 다른 이의 우울증상을 이해하기 어렵다.

 서른이 되며 겪은 나의 첫 번째 우울증은 심한 무력감은 있었지만 일상은 가능했다. 하지만 다시 찾아온 두 번째 우울증은 정상적 생활이 거의 가능하지 않을 만큼 몸과 마음이 완전히 병들어 있었다.


 시작은 결혼 후 몇 달간 계속된 깨질듯한 두통이었다. 두통과 함께 온 난독증으로 글을 읽을 수 없게 되면서 하던 일을 모두 중단해야 했다. 두통은 시작일 뿐이었다. 이명, 어지럼증, 복통 등 이유 없이 몸 여기저기에 이상 증상이 나타났다. 모든 것에 너무 예민해져 짜증과 분노가 계속 일었고, 별 것 아닌 말도 모두 나를 공격하는 것으로 느껴져 사람을 만나기가 두려웠다. 약 처방에 따라 때로는 잠을 너무 많이 잤고, 때로는 움직일 수 조차 없이 무력해졌다. 약 때문에 무력한 건지, 우울 때문에 무력한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도움을 받고 싶었지만, 신체능력과 인지능력이 모두 떨어져 상담을 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에너지조차 없었다.


  언제까지 이런 상태가 계속될지 모르겠는 막막함 속에 그저 ‘살아만’ 있는 일상이 이어졌다. 무엇보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다는 게 가장 힘들었다. 차라리 몸에 큰 병이 걸리면 이해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멀쩡한 몸으로 이렇게 아무것도 못하며 누워만 있는 건 나조차 이해하기 어려웠다. 언제까지인지도 모르는 어둠에서 혼자 버텨야 하는 게 무서웠고, 더 버틸 수 없다고 느끼는 순간마다 삶보다 죽음이 훨씬 평화롭게 느껴졌다. 어찌나 죽음이 달콤하게 느껴지는지 죽고 싶은 충동이 올라올 때마다 죽지 않기 위해서 정말로 최선을 다해야 했다. 하루종일 온갖 부정적인 생각과 자살충동에 시달리다가 녹초가 되어 쓰러지고, 다시 하루가 시작되면 반복해서 죽고 싶은 충동에 맞서하는 날이 반복되면서, 나는 점점 내가 살아있어야 하는 이유를  잃어갔다.


무의미와 막막함,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답답함에 절망을 느껴본 사람이
결국 방향을 찾을 수 있다.
- 우조티카 선사


 내가 갇혀있는 방 안에 아주 작은 창문이라도 있었다면, 간신히라도 숨을 쉴 수 있으니 그냥 버텼을 것이다. 사방이 벽인 방에 갇혀 죽을 수밖에 없다고 느낀 그때, 아무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그때가 바로 삶이 나에게 마련해준 ‘나를 찾는’ 시작점이었다.





 우울의 원인 중 하나였던 결혼생활이 우여곡절 끝에 마무리되며 조금은 숨을 쉴 수 있게 되었지만, 내 삶은 여전히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폐허 같았다. 아무 때고 갑작스레 눈물이 마구 쏟아지고, 음식을 거의 먹지 못하는 등 하루하루를 무사히 살아내는 것만도 여전히 벅찼다. 죽음은 여전히 매력적인 도피처였다. 이 모든 걸 끝낼 수만 있다면.... 그저 사라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생하게 죽음을 상상하는 게 유일한 안식이었다.

 그러나, 2년여 동안 죽을 방법에 대해 연구한 끝에 결국 죽기는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유는 어이없게 단순했다. 바퀴벌레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하는 소심한 내가, 누군가를 때려서 상처를 내본 적도 없는 겁 많은 내가, 이렇게 커다란 짐승(나)을 죽이는 건 시도조차 가능하지 않았다. 맙소사.

 죽을 수 없다는 건 정말 절망스러웠다. 스스로 죽을 수 없다면 죽을 병에라도 걸렸으면... 교통사고라도 났으면.... 삶을 끝낼 수 없는 막막함에 몸부림치며 허덕이던 중, 어느날 죽고 사는 문제가 내 영역이 아니라는 것에 완벽히 승복하게 되었다.

 '그토록 죽고 싶어하고, 갖은 애를 썼는데도 이렇게 살아있고, 언젠간 너무나 절박하게 살고 싶은데 죽게 되겠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닌 영역에 그토록 매달렸구나... 그래서 고통스러웠구나...'

 갑작스러운 명료한 깨달음과 함께 ‘할 수 없는 일’은 내버려 두고 ‘할 수 있는 일’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어짜피 못죽을 꺼라면, 그렇다면 이 끔찍한 삶을 ‘살고 싶게’ 만들어보자. 그건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경험은 끝까지 가야 끝이 난다. 나는 드디어 ‘죽음’에서 ‘삶’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다.






 지난 삶을 돌아보며 무엇이 문제인지 찾기 시작했다. 

 삶의 큰 두 축은 ‘일’과 ‘관계’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영리하고 일을 잘한다. 어디가서 일을 못해 곤란한 상황을 겪어 본 적은 없다. 그렇다면 내 삶이 이렇게 추락한 건 일 때문이 아니다. 그럼 나의 문제는 관계에 있구나... 맞다. 나는 관계가 늘 불편했다. 사람들의 행동이나 표정 하나에도 쩔쩔매며 눈치를 봤고, 언제나 다른 사람의 기분을 맞춰주려 애썼다. 무대에서는 내 곡이, 내 연주가 너무 형편없지 않을까 두려웠고, 이렇게 사랑받으려 애쓰는 자존감 낮은 나 자신이 너무 싫었다.

 계속해서 생각을 거듭하다보니 관계의 출발점은 나 자신이며, 관계에 문제가 있는건 나에게 해결할 문제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내 삶이 이렇게 우울로 곤두박질친게 불행한 결혼도, 일의 실패도 아닌 바로 ‘나’ 때문이라니... 더 이상은 상황탓을 할 수 없었다.  


 나의 문제라는건 알겠는데, 어떻게 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는 아무리 혼자 끙끙대봐도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도움을 받고 싶었지만, 상담비가 막막했다. 갖고 있던 악기들을 팔아서 한 달, 인터넷에 가입하고 받은 상품권으로 한 달, 엄마가 어릴 적 준 돌반지를 팔아서 한 달, 교회에서 익명의 헌금을 전달받아 한 달... 모아둔 돈도 없이 어찌 보면 기적처럼 간신히 버텨온 일상이었다. 아직 정상적으로 일을 할만큼 체력도 회복되지 않아서, 적지 않은 상담비를 내 힘으로 마련하려면 아주 오랜 시간 이대로 기다려야 했다. 그럴 수는 없었다. 단 하루라도 빨리 문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평소 가족을 포함한 누구에게도 폐 끼치지 않으려 하는 나였지만, 죄스럽고 미안한 마음을 꾹꾹 누르고 엄마에게 어렵게 도움을 요청했다. 행복해지거나  편안해질 거라는 기대조차 없었다. 그저 지금보다 괴롭지만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어떤 문제로 상담을 받고 싶나요?”

 상담사님의 질문에 도무지 답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문제들이 있었다. 타인과 비교하며 괴로운 것, 게으르고 의지도 박약한 문제많은 성격,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맹목적 욕구, 좋아하는 일을 할 기회를 얻지 못한 분노와 억울함, 남들에게 불편을 주는 예민한 성격, 반복되는 불행한 연예 패턴과 이혼에 대한 충격, 가족에 대한 분노와 죄책감....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실타래처럼 얽혀있어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일단 상담 선생님의 도움으로 분노, 무기력, 죄책감... 등의 폴더로 분류해 정리해보았다. 정리를 해놓고 보니 해결할 문제들이 얼마나 많은지 한눈에 보였다.

 대부분 상담을 받으러 올만큼 힘들다고 느낄 때는 한두 가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또 문제와 문제가 모두 연결되어 있어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막막하고, 그 막막함에 압도당해 더 우울하고 무기력해지기도 한다.

 ‘과연 이 모든 문제를 내가 해결하고 나아질 수 있을까....’

 안 그래도 오랜 시간 우울을 겪으면서 남아있던 1%의 긍정적인 마음조차 증발한 상태였기에, 회의감과 절망감에 압도당한 채 첫 상담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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