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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조성 강사 라라 Jul 07. 2022

나는 다능인이다


나는 다능인이다. 뭐든 시작하면 중간 이상은 한다. (아.... 수학이나 컴퓨터, 기기 관련은 바보수준이다. 이 영역은 제외;;)

그래서 뭐든 어렵지 않게 빨리 습득하고, 함께 시작한 사람들보다 앞서간다.

맡겨진 일도 거의 다 잘한다. 살면서 일 못해서 욕먹어 본 적은 없다.

그런데...


한 분야에 제대로 능통할 때까지 머물지는 않는다.

관심사는 문어발처럼 여러갈래로 뻗어나가고, 궁금하고 경험하고 싶은 것는 내 기억이 있는 6세 이후로 지금까지 늘 끝도 없다.



스무살.
교사가 되고 싶었다.

주전공 수업도 거의 안들어가는 날라리였던 내가, 부전공인 교직이수 수업만큼은 착실히 들었다.

4학년 1학기.

꿈에 그리던 교생실습을 A+를 받으며 마친 후, '교사는 아니구나' 결론 내렸다.

'분명히 후회한다'고 모두가 뜯어 말렸지만, 결국 마지막 학기 교직이수 수업은 듣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 말대로 교직이수 포기한 것을 후회할 일은 없더라.)



교사의 꿈을 접은 후,
스튜어디스가 되고 싶었다.

교정 시력 1.0 조건에 맞추기 위해 라식수술을 했다.(당시 시력이 안좋았는데, 눈에 이물감을 못견뎌 렌즈를 착용하지 못했다.)

팔에 흉터가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해서 흉터 크기를 줄이는 성형수술도 받았다.

몇달간 영어회화와 토익 공부도 했다.

승무원 면접 준비도 꽤 오래 했다. (30분동안 얼굴 경련 안일어나게 웃는 얼굴 연습, 승무원 자세로 서고 인사하기 연습 등등)


대한항공과 아시아나, 두 항공사의 면접을 본 후

승무원은 되지 않기로 결심했다.

나의 서비스 마인드나 일에 대한 열정, 영어실력은 전혀 중요하지 않고,

무슨 미스코리아 선발하듯(또는 흠있는 과일 걸러내듯) 내 몸매를 돌려가며 훑어보는 면접이 실망스러웠다.



스튜어디스를 접고,
언제나 언젠가 하려고 했던 음악을 하기로 했다.

1년 걸린다는 화성학 공부를 한달만에 마스터하고 동아방송대 방송음악과에 합격했다.

...학교가 너무 멀어서 다니기 힘들 것 같아 입학하지 않고, 대신 가성비 높은 재즈아카데미에 입학했다.

내가 좋아하는 공부를 하니 너무 신났다! 모든게 너무너무 재밌었다!!!!!!!

런데...


막상 공부를 시작하니 음악의 장르는 방대했고,

내가 하고 싶은게 작곡인지 연주인지 편곡인지 장르는 어떤 쪽인지 결정하지 못해, 3년을 방황했다.

다능인답게 어느 분야도 못하지는 않았지만, 딱히 특출나게 재능을 보이는 곳도 없었다.

작편곡과를 다니는 동안은 아무래도 연주가 더 하고 싶은 것 같았고,

재즈피아노과에 재입학 하고 나서는 연주를 할수록 '이건 확실히 내 길은 아니다' 싶었다.


아카데미를 졸업할 무렵, 드디어 3년만에 답을 찾았다.


내가 하고 싶은 건 뮤지컬 작곡이었어!!
유레카!!!!!


그 때부터 뮤지컬을 팠다.

평생 뮤지컬 작곡을 하고 살고 싶을만큼 열정적이었고,

어렵게 찾은만큼, 드디어 변하지 않는 내 꿈을 찾았다고 확신했다.

우여곡절과 많은 좌절의 순간이 있었고,

오지 않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 (그토록 가고 싶지 않았던) 대학원에도 진학했다.

그런데....


한학기 만에 자퇴했다.

음악극창작과가 생긴 이래 내가 첫 자퇴자였다.

이유는. 하아...

첫학기를 다니는동안 내가 뮤지컬에 더이상 흥미가 없다는게 점점 확실해졌다.

(그런 나의 변화를 나조차 이해할 수 없어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래! 나는 전통음악을 좋아했잖아!
전통음악을 배워보자!


빡시게 공부해서 전통음악 작곡과에 재입학했다.

너무 짧은 기간에 너무 많은 공부를 하느라 머리가 터질 것 같았지만, 그걸 또 어찌저찌 해냈다.

.....

1년을 꾸역꾸역 참고 다니다가 또 자퇴했다.

정말 최선을 다해 수료까지는 해보려 했는데...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가능하지 않았다.

나의 관심사는 이미 음악에서 '치유'로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같이 입학했던 친구가 '학비와 지금껏 공부한 시간이 아깝지 않냐'며 말렸지만, 나는 앞으로 더 내야 하는 학비와 공부할 시간이 더 아까웠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직이수 포기할 때보다 더 강력히 뜯어말렸다.

분명히 후회할꺼라고. 제발 잠깐만 참고 다니라고.

(물론 나의 자퇴를 후회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그 당시 나름 작곡과 음악감독이 업으로 자리잡고 있을 때였는데.

12년간 했던 전문사탐강사를 하루아침에 그만둔 것처럼.

10년 넘게 해온 작곡과 음악감독을 또 하루 아침에 그만두었다.



나도 강의를 하고 싶다!


그 이후. 창조성워크숍을 시작할 쯤,

김미경 강사님의 세바시 강연을 보다가 꽂혔다.

도서관에 붙어있는 강의 알림과 강사 소개만 봐도 부러웠고,

지인이 강의하고 왔다는 얘기만 들어도 부러웠다.


...살다보니 여기저기서 강의 의뢰가 들어왔다.

그런데 생각보다 시원찮은 나의 강의 실력이 실망스러웠다.

그래서 김미경 강사님의 '스피치 마스터 클래스' 강의를 신청했다.

반년 넘게 스마클 강의를 듣고, 스피치 연습을 하고, 5분 스피치 무대에 서면서.

서서히. 천천히. 깨닫게 되었다.


'강의는 내 일이 아니구나.'


어제 도서관에서 강의를 하고 돌아오는 길.

이제 이 경험이 충분하다는 느낌과 함께, 마침표가 찍어졌다. 앞으로 외부 강의는 하지 않기로.

이렇게 마침표를 찍어질 때 어떤 명료한 느낌이 있다. 그 느낌을 느끼면 나는 무엇도 후회하지 않는다. 나름 다능인으로서 살아가는 삶의 패턴을 찾은 것.




이따구로 살아온, 또 살아가고 있는 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대략 두 가지로 나뉜다.


'참을성이 없다', '너무 제멋대로다', '뭐 하나라도 제대로 하는게 없다', '현실개념이 없다' 등등의 반응.


'그걸 다 하는것도 능력이다', '집시같다', '자유로워 보인다', '잘하는게 많으니 얼마나 좋겠냐'는 반응.


어느 쪽도 나를 있는 그대로 이해받은 느낌은 없다.

내가 잘나서 이렇게 사는 것도 아니고.

내가 이렇게 살고 싶어서 이렇게 사는 것도 아니니까.



언젠가 나의 유전자키를 묵상하다가 떠오른 이미지가 있다.


떠돌이 개


이 마을 저 마을 떠돌아 다니면서, 전혀 다른 사람을 만나 전혀 다른 경험을 한다.

내가 해왔던 경험들은 마치 박물관에 전시되듯 하나하나 전시물처럼 전시된다.

하지만 나는 그 전시물들에 대해 집착하지도, 후회하지도 않는다. 딱히 자랑스럽지도 않다. 그저 무심히 바라볼 뿐이다.


그리고.

그냥 또 어느 낯선 곳으로 새로운 경험을 하러 떠난다.


아마도 다능인들이 자신의 삶을 온전히 수용한다면. "삶은 여행"이라는 말의 의미를 온 존재로 뜨겁게 이해할 것이다.




다능인이 사람들의 기준에 맞추어 무언가 한가지에만 집중하려고 한다면.

'나는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도, 딱히 잘하는 것도 없어'라며 자신을 수용하지 못하고 자책하게 된다면.

금세 질리고, 뭔가 하다 금방 그만두거나 중도에 포기하고, 또다시 새로운 것에 흥미를 느끼는 자신에게 '더이상은 안돼!'라고 말한다면.

삶이 아주 아주 아주 많이 괴로워질 것이다.


다능인은 다능인으로서의 삶이 있다.

인생을 여행하듯 이것저것 경험하고 구경하는 것.

여행자가 정착하지 않듯이, 어디에도 정착하지 않는 것.


그런 다능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그들만이 세상에 할 수 있는 기여가 있다.


인간은 다르다.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

이 단순한 진리는 삶에서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나는 세상이 '다름'을 이해하고 수용하도록 계속해서 떠드는게 나의 일이라는 걸.

확실히 알고 있다.


이 글을 읽고있는 당신이 다능인이라면.

자신이 선택하고 끌렸던 모든 것에 그 어떤 자책도 원망도 후회도 하지 않고. 부디 온 세포로 자신의 '다름'을 끌어안고 사랑해주길.


당신이 다능인이 아니라면.

세상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기준에 도무지 맞지 않는 다능인을. 그냥 그렇게 살게 허용해주길.

다능인에게 '좋겠다' 또는 '힘들겠다' 그 어떤 쪽도 아닌.

그냥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해주길.




...한동안은 에니어그램 4번 유형이 마구마구 내 앞에 나타나더니. (하루에도 여러번 '비둘기 구구구'를 얘기해야 했다. 아는 사람은 알꺼임)

요즘에는 연이어 다능인들이 나타난다.


자신의 생김대로 살아가고 싶지만, 여러 어려움으로 고군분투하는 다능인들을 공감하고 응원하고 싶어서.

오랜만에 성치 않은 몸으로 긴 글 써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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