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미래 시대 가장 중요한 능력은 창조성’이라고 강조한다. 대학들은 ‘창조적 인재 육성’을, 기업은 ‘창조경영’을, 정부는 ‘창조경제’를 내세운다. 그러나 정작 창조성이 과연 무엇인지, 어떻게 창조적 역량을 키울 수 있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 대부분의 사람은 창조성이라는 단어조차 낯설기만 하다.
‘창조성’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대부분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그림을 떠올린다. 아인슈타인이나 리처드 파인만 같은 천재적인 과학를 떠올리기도 한다. 혁신적인 사업가인 스티브 잡스나 빌게이츠도 왠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또는 자신의 귀를 자른 화가 고흐나 우울로 생을 마감한 작가 헤밍웨이 같은 비범한 예술가들도 생각난다. 무엇이 떠올랐든 창조성은 평범한 나와는 별 상관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정말로 창조성이 나와 상관이 없을까? 창조성의 사전적 정의는 ‘새로운 것을 생각하고 만들어내는 특성’이며 유의어로는 ‘독창성’이 있다. 우리는 누구나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나만의 독특함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다. 지금 내 모습을 한번 살펴보자. 나의 헤어스타일, 입고 있는 옷의 색과 디자인에도 나만의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담겨 있다.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도 나를 표현하고 싶은 창조적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뇌과학자 모기 겐이치로는 ‘창조성은 특별할 것 없이 일상적으로 늘 일어나는 뇌의 작용’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창조성은 예술, 과학의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아침에 화장을 할 때도, 청소나 설거지를 할 때도 창조성은 발휘된다. 매일 반복되는 일도 하던 대로 하지 않고 이전과는 조금은 다르게, 조금 더 나은 방법을 찾고 있다면 우리는 창조성을 발휘하고 있는 중이다. 인간의 뇌는 언제나 새로움과 뜻밖의 놀라움을 원한다. 그것이 어제와 다른 맛의 커피든 화성 여행이든 말이다.
창조성은 인간의 보편적 본성이다
아기들은 겨우 두 발로 서자마자 자유로워진 두 팔을 흔들며 춤을 춘다. ‘어버버워어어~’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노래도 부른다. 연필을 쥐어주면 무언가 그린다. 온 사방을 돌아다니며 무엇이든 보고 만지고 맛보면서 새로운 것을 탐험한다. 모든 아기는 완벽하게 창조적이다. 아기의 모습에서 알 수 있듯 창조성은 배워야 하는 것도, 일부의 사람만 갖고 태어나는 것도 아니다. 창조성은 태어나면서 기본적으로 탑재되어 있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이다.
문명이 시작되기 전에도 인류는 동굴에 벽화를 그리고, 악기를 만들어 두드리며 춤을 췄다. 생존과 관련이 없어도 몸을 장식하고, 노래를 부르고, 이야기를 만들었다. 단지 자기만족을 위해서, 일상을 특별하게 즐기기 위해서였다. 딱히 가르치거나 배우지 않아도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인간은 언제나 창조성을 발휘하며 살아왔다. 그러니 나에게 과연 창조성이 있는지, 창조적인 사람이 될지 말지 고민할 필요조차 없다. 우리는 누구나 창조적으로 태어났고 언제나 창조적이었으며, 지금도 매 순간 무언가 창조하며 살고 있다.
세계적인 창조성 강사 줄리아 카메론은 ‘창조성은 피 같은 것’이라 표현한다. 피가 내 몸 안에 흐르고 있지만 내가 만들어낸 것은 아니듯이, 창조성도 내 정신 속에 존재하지만 내가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창조성은 노력하고 계발하지 않아도 이미 내 안에 흐르고 있다. 창조적인 사람과 창조적이지 않은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창조성을 계속 순환시켜서 생명력을 갖는 사람과, 창조성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억눌러 생명력을 막아놓은 사람이 있을 뿐이다.
창조성은 생명력이다
피가 흐르지 않으면 생명이 멈추듯 자연스러운 창조성의 흐름을 억누르면 우리는 생명력을 잃게 된다. 창조성은 즐거움, 재미, 호기심과 연관되어 있다. 사람들은 즐거움이나 즐거움이나 재미는 시간 많고 돈 많고 여유 있을 때나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즐거움, 재미, 호기심, 즉 창조성이 사라지면 육체는 살아있을지 모르나 정신적인 생존이 위협받게 된다.
우리는 내면에서 이유 없이 끌리는 창조적 욕구를 따라 행동할 때 즐거움과 만족감을 느낀다. 그럴 때 내가 어떤 존재인지, 무엇을 하고 싶고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발견하며 남들과 구분되는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아가게 된다. 내면의 자연스러운 끌림과 호기심을 억누르면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고 내 존재가치를 찾을 수 없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우울하고 무력하고 공허해진다.
내 안에서 나를 찾지 못하면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는 것으로 존재감을 얻으려 한다. 외모, 재산 등의 외부적 성공에 집착하거나, 무작정 자신을 희생해 타인을 돕는 것으로 내 존재 이유를 찾으려 애쓰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외부에서 어떤 인정을 받아도 내면의 창조적 욕구를 억압하면 점점 더 무력감에 빠져든다. 내 삶에 내가 없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정체성을 잃을수록 무엇을 해도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살아있지만 죽은 것과 다름없는 ‘영혼 없는 삶’을 살거나, 그 상태를 견디지 못하고 끝내 삶을 포기하기도 한다. 창조성을 억누르며 사는 사람에게는 한결같이 기쁨, 즐거움, 만족감이 결여되어 있다. 많은 것을 성취하고 물질적 부를 가졌어도 창조성을 잃은 사람들에게서는 반짝이는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뇌과학자 모기 겐이치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창조성을 제대로 활용하는 것은 시대의 요청일 뿐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기도 하다. 창조적인 삶을 살 때 보다 잘 살 수 있으며, 보다 잘 살아야 창조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창조성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것이 아니다. 평범하고 고된 일상에 즐겁고 활기찬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 공허함과 우울에서 벗어나 살아있음에 기쁨을 느끼는 것, 내가 누구인지 왜 사는지 존재의 의미를 찾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창조성이다.
창조성은 삶의 질과 직결된다
예술(藝術)의 한자어를 살펴보면 ‘뛰어난 기술’을 의미한다. 예술의 어원도 동서양 모두 ‘과제를 해결해 내는 숙련된 능력’을 의미한다. 우리는 일상에서 감탄이 나오는 뛰어난 무언가를 접하면 ‘예술이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깔끔하고 보기 좋게 정리된 친구의 노트필기를 볼 때, 먹기 아까울 만큼 예쁘게 담긴 식사가 나올 때, 능수능란하게 일을 해내는 ‘생활의 달인’을 볼 때도 우리는 ‘와! 예술이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예술은 단지 예술가의 작품에만 국한되지 않는 광범위한 의미를 갖는다. 뛰어나고 숙련된 기술이나 그 결과물을 마주하는 순간마다 우리는 예술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창조성은 일상을 예술로 만든다. 청소를 하든 일을 하든 즐거움과 호기심을 갖고 새로운 방법으로 접근한다면 그 행위나 결과는 예술이 될 수 있다. 같은 청소라도 지루해하며 억지로 할 수도 있고, 즐겁게 청소를 해낼 나만의 방법을 찾아서 재밌게 할 수도 있다. 더 즐거울 수 있는 요소를 찾는 것, 더 나은 방법을 궁리하고 시도해 보는 것은 모든 일상을 흥미진진하게 바꾸어 놓는다. 창조적으로 접근하는 일들은 그게 무엇이든 점점 더 뛰어나고 숙련된 솜씨를 발휘하게 된다.
창조성은 능력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다. 창조적인 사람, 창조적인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태도로 하는 행동과 그렇지 않은 행동이 있을 뿐이다. 하고 싶은 일도 성과만을 위해 괴롭게 할 수 있고, 하기 싫은 일도 즐겁고 신나게 할 수 있다. 창조적인 태도로 살아갈 때 우리는 무엇을 하든 더 즐겁고 만족스럽게 몰입해서 할 수 있다. 창조적인 태도로 하는 일은 공부든 집안일이든 점점 더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려진다. 창조적인 태도는 삶의 질을 높여준다. 창조적으로 살 때 우리 삶은 더 의미 있고 즐거워지며 더 많은 기쁨과 만족감을 누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