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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RGO May 04. 2019

영화 듀엣을 아시나요?

에딘버러 여행기 Episode 4



'지금이다! 지금 올라가야겠다!’


구름이 움직이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곧 해가 비출 것 같았다. 나는 직감적으로 홀리루드 파크에 올라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런던의 변화무쌍한 날씨를 겪어보니 영국에선 지금 이 순간, 날이 좋으면 미루지 말고 즐겨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머무는 동안 언제 또 날이 좋아질지 모르니 기회는 지금 뿐이었다. 맑은 날, 파크에서 에딘버러를 내다볼 수 있는 기회는.


스코틀랜드의 4월은 참 춥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곳에서도 꽃이 피고 지고 있었다. 특히 봄이 되면 홀리루드 파크에 노란색 꽃이 피는데, 이 꽃이 피면 사람들은 봄이 온 것을 안다고 한다. 나는 운 좋게도 봄을 알리는 노란 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너무 추워서 패딩에 목도리까지 두르고 걷고 있는데 여기저기 반팔, 반바지 운동복을 입고 조깅을 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이 곳 사람들에게는 이 추운 날씨도 봄의 날씨인가 보다. 나는 갑자기 스코틀랜드의 겨울 날씨가 궁금해지기도 했다.

 


(숙소에서 5분 정도만 걸으면 바로 파크의 입구가 나온다. 사실 다른 곳이 자리가 다 차서 남은 숙소를 예약한 건데 바로 옆에 홀리루드 파크라 좋았다.)



나는 단순하게 이 파크의 정상으로 불리는 '아서시트'에 올라가기로 했다. 아니 올라가야만 했다. 모르겠다. 그때 내 마음이 그랬다. 구글맵에 아서시트를 치고 무작정 길을 안내해주는 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예정시간은 30분으로 뜨지만 30분이 더 걸릴 것을 직감했다. 내 눈 앞에 보이는 길은 가파른 길, 내 좁은 시야로는 다 보이지 않는 오르막 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어떻게 그 지친 몸으로 올라갔었나 싶다. 분명 야간 버스와 무거운 배낭으로 지친 몸이었다. 그러나 날이 개이고, 아서시트를 향한 열망(?)으로 피곤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나는 열심히 파크를 올랐다. 천천히 가파른 오르막길에 발을 내디뎠다. 바위도 밟고, 계단처럼 놓인 돌도 밟고, 잠시 멈춰 숨도 고르며. 그리고 나는 자꾸만 감탄했다. 멈출 때마다 보이는 풍경들이 내 넋을 놓게 만들었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에딘버러의 전경이 내다보였다. 꼭 숨어있다 슬그머니 나타나는 것처럼. 조금씩 조금씩 저 멀리서 바다가 고개를 내밀었다. 동시에 드넓은 파크의 모습도 색다르게 비쳤다.




저 멀리 보이는 에딘버러의 전경.


가파른 길을 한참을 올라가다 평지가 나왔다. 여기까지 올라오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마음은 피곤이 사라졌지만 몸은 여전히 지친 몸이기 때문이었다. 여기까지만 올라갈까? 하다가도 언제 또 날이 좋을지 모르니 지금 뿐이다, 라는 다짐으로 몸을 움직였다. 민둥산 하나 올라가면서 나 혼자 비장(?)했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바람이 세찼다. 자꾸만 머리카락이 날려서 나는 패딩 모자를 쓰고 그 위에 목도리를 감아 머리카락을 고정시켰다. 4월에 내가 이런 모습을 한 적은 아마 태어나서 처음인 것 같다.


평지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풍경을 바라보았다. 가파르게 올라갈 땐 분명 나 혼자였는데 어느새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들이 꽤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사진으로 순간을 남기고, 짙은 풀색으로 덮인 평지에서 풀들은 바람에 넘실거렸다.



나는 영화 <듀엣>이 생각났다.


몇 년 전, 늘 영국이 가고 싶었던 나는 우연히 이 영화를 찾아보게 되었다. 고아성이 주연으로 나오는 독립영화. 영화의 내용이나 배우들의 연기가 조금 허술했지만 이상하게 영화는 내 뇌리에 박혀버렸다. 내가 그리던 영국이 나오기도 했고, 무엇보다 영화 OST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듀엣>에서 나온 영국의 풍경과 OST가 너무나 잘 어울렸다. 심지어 나는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서 나오는 장소협찬도 캡쳐를 해놓고 따로 노트에 적어두기도 했다.

영화 Duet.


'언젠가 영국에 가면 나도 꼭 저기를 가봐야겠다.'


나는 처음 이 영화를 보고 더 영국이 가고 싶어 졌다.


풀들이 넘실대는 홀리루드 파크의 어느 곳에서, 나는 내가 그려오던 그 순간에 있음을 깨달았다. 영화의 OST를 틀었다. 카메라를 메고 헤드셋을 끼고 여행을 하던 여주인공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녀처럼 나도 자유롭게 여행을 하고 있어서, 그 여행지가 내가 생각하던 영국의 어딘가여서,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넘실대는 풀들이 영화 OST와 너무 잘 어울려서. 마음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다.  




시선을 다시 앞으로 두니 아주 가파른 언덕이 보이고 그 끝에 아서시트 정상이 보인다.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정상까지 올라가야지. 나는 다시 언덕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는 길이 사실 무서웠다. 나는 높은 곳이나 밑이 뚫린 다리 같은 곳을 건너는 걸 무서워한다. 무서워서 더 천천히 올라갔다. 일부러 몸을 눕혀 올라갔다. 정상에 올라가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바람은 세찼지만 올라오는 길에 땀을 흘려서 그런지 시원했다.


꼭 정상의 기쁨을 맛보기 위해 올라옴의 수고를 감수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달랐다.


올라오는 동안 무리하지 않게 정상을 올라갔다. 남들에 비하면 확실히 속도가 느렸다. 그렇지만 내 몸이 지치지 않는 선에서 나는 나를 움직였다. 아마 다른 사람의 속도를 따라갔다간 나는 중간에 쓰러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올라오는 동안 나만의 시선으로 아름다운 풍경을 많이 담았다. 눈으로 담고, 입으로 감탄하고, 귀로 듣고, 코로 맡았다. 그리고 손을 움직여 사진으로 담았다. 나는 자꾸만 멈춰 온 몸으로 풍경을 느꼈다. 그래서 올라오는 과정이 힘들면서 동시에 즐거웠다. 힘들어서 탄식하고, 너무 좋아서 감탄했다.


내 인생의 속도가 지금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남들보다 느리다. 생각하고 느끼며 인생을 사는 바람에 인생의 속도가 조금 더디다. 나는 내 건강도 소중하기 때문에 몸을 무리해서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내 인생길을 걷는 동안 나만의 시선으로 많은 것을 담는다. 자꾸만 멈춰 서서 풍경을 바라본다. 물론 지쳐서 멈출 때도 있다. 그냥 주저앉아버릴 때도 있다. 그렇지만 내가 가는 인생길을 포기할 생각은 없다.


그래서 나는 나의 인생길에서, 힘들어서 탄식하고, 좋아서 감탄하고 있다. 내 인생길의 정상이라는 곳은 있기나 한 걸까? 정상에 올라가면 좋긴 하지만 그냥 걸어가는 이 과정을 꾸준히 즐기고 싶다. 남들보다 느리면 어때. 느리지만 많이 느끼고 감탄하니까, 이거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때로는 느린 내가 너무 싫다가도, 이럴 땐 느린 내가 너무 좋다.


아서시트에서, 사람들의 모습.


아서시트에서 사진을 남기고 천천히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을 따라 오른쪽엔 푸르름이 넘실거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오른쪽으로 바꿨다. 사람들은 길을 따라 내려가는데 나만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그리고...


털썩,

"아 좋다!!"


그 푸르름 속에 누워버렸다. 푸르름 속으로 들어가 나도 푸르러져 버렸다. 그래서 너무, 정말 너무 좋았다. 그때의 기분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넘실대던 풀 속으로 누워버리니 나 자신이 꼭 모든 것에서 해방되어 자유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마침 패딩을 입고 누워서 땅은 폭신하게 느껴졌다. 신발도 벗었다. 스타킹을 신었지만 나는 발바닥으로 땅을 느껴보았다. 보드랍다... 이대로 누워 눈을 감았다. 맑은 하늘, 햇빛, 바람소리, 풀의 촉감... 모든 것이 좋았다. 나는 잠시 누워 음악을 들었다.


마치 내가 이 파크의 일부분이 된 느낌.

혹은 이 자연 속에 내가 파묻힌 느낌.

그래서 자연이 나를 포근하게 안아주는 느낌.

그런 느낌이었다.


누운 몸을 일으켜 앉아 풍경과 사람들을 구경했다. 지나가던 할아버지가 나를 향해 미소를 지으신다.

마치, '요 녀석 제대로 즐기네.' 하는 미소 같았다. 엉덩이를 털고 다시 내려가는 길로 갔다.  

잊지 못할 순간.
넘실대던 푸르름.


더 내려가니 오른쪽으로 파크가 노란 꽃들의 향연이었다. 그 모습이 꼭 봄 같았다. 내려가는 길은 너무나 쉬웠다. 다 내려오면서 알게 된 사실은 내가 내려왔던 길이 곧 올라가는 길이었다는 거다. 그러니까 쉬운 길이 있었다는 것... 나는 구글맵이 알려준 조금 어려운 (?) 길로 올라갔던 것... 그렇지만 좋았지? 좋았으니까 됐어!


노란 꽃들의 향연.


파크를 내려오니 딱 점심을 먹을 시간이 되었다. 다시 구글맵을 켜서 내가 가려던 식당을 검색하니 도보 25분이라고 뜬다. 등반 후라 지쳐서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른 오전, 춥고 흐리던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맑고 화창한 에딘버러가 나를 다시금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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