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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진심이 진심에 덮여 사소해질 가능성

박세미, 몇 퍼센트입니까(「내가 나일 확률」)

by 지인 acquaintance

어제는 가을 같은 여름이었다. 반팔 하나 덜렁 입고 돌아다니기엔 너무 쌀쌀한 날씨였다. 더우면 덥다고 진저리 칠 거면서, 뜻하지 않게 오소소한 하루를 보내는 중에는 6월 날씨가 뭐 이렇냐며 맨투맨을 입었어야 한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기다리던 가을을 지나가던 중에도 어쩌다 덥거나 추우면 가을날씨가 또 변덕이라며 그날에 덧붙이고 만다. 계절마다 계절에게 기대하는 날씨가 있다.



당신에게 기대하는 당신이 있다. 당신은 추울 수도 더울 수도, 하루에도 온도가 끊임없이 변하는 날씨이다. 일주일 중에도 똑같은 날은 절대로 없다. 흘러가는 구름의 모양과 일조량은 동일한 계절로 묶이는 날들 중에서도 끊임없이 변한다. 그런데 나는 당신에게 관대하지 못해서 정해진/예정된 당신이 있기를 바란다.



당신이 기대하는 나의 모습이 있다. 내가 되고 싶은 나의 모습이 있다. 그런 사람인 척 애쓰는 시간이 평생이라 가끔은 내가 제일 불행한 사람이 되어 버린다. 기대받는 그 모습이 되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나의 진심은 순수한가.




당신 옆을 지나칠 때 우연히

내 걸음이 놓친 것들 나를 통과한 말들

진심이 진심에 덮여 사소해질 가능성

내가 나일 확률


뜀틀 하나를 넘으면 다시 뜀틀


낮과 밤의 경계에서

누군가는 동물이 된다는데

몸속을 뒤집어 가장 순결한 보호색을 띤다는데

당신이 당신일 확률


뜀틀 하나를 넘으면 다시 뜀틀

그릇이 깨지는 날엔 손이 가벼워졌다


내가 나를 다스릴 수 있다는데

스스로 밧줄을 쥐고 있을 가능성


- 박세미, 몇 퍼센트입니까(「내가 나일 확률」)




뜀틀을 넘어야 하는 시간이 가장 두려웠다. 더 애써보지 않아도 알았다. 나는 내 눈앞에 놓인 뜀틀을 넘을 수가 없다. 뜀틀의 높이가 문제가 아니었다. 덜 높게 쌓는다 해서 내가 넘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처음엔 내가 연습량이 부족해서, 그저 방법을 몰라서, 부딪혔을 때의 아픔이 무서워서, 넘지 못하는 내 모습이 부끄러워서, 그래서 못 넘는 걸까 생각했다. 아무도 없을 때 몰래 연습해보기도 했고, 좀 더 멀리서 힘껏 달려가 손을 뻗어 짚어 보기도 했다. 집에서 네모나게 이불을 쌓아 올려두고 넘어보려 한 적도 있다. 그런데 나는 아무리 해도 그게 안 됐다. 뜀틀 앞에 실컷 달려가서는 멈춰 선다.



넘지 못하는 나를 인정하는 게 나로 사는 걸까, 넘지 않는 걸 선택하는 것이 나로 사는 걸까.



넘어서든, 넘지 못하든 뜀틀 하나를 넘으면 다시 뜀틀.

항상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후회하지 않는다고, 줄을 놓은 건 내 선택이었다고. 이렇게 말하는 나는, 몇 퍼센트의 진심인가.




당신은 나에게 나답게 살라는데, 내가 나로서 살 확률.

나는 당신에게 당신답게 살라는데, 당신을 당신으로서 바라보는 확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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