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살기 10일: 순간을 오래 기억하는 법
제주살기 10일차 아침이다. 어느덧 3주살기 중 반이 지나고 있다.
일단 조식을 먹으러 내려가자.
제육덮밥과 브로콜리 수프로 든든하게 식사했다. 천천히 먹고 쉬다가 일정을 시작했다.
느긋함을 추구하는 여행 스타일은 H도 마찬가지라 무리하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오름을 소개하고 싶어 용눈이오름을 다시 방문한다.
여전히 평화롭다.
오늘은 말이 울타리 밖에까지 나와 풀을 뜯는다. 친한 척 가까이 다가가도 도망치지 않는다.
사진기를 들이대면 보통 뚝딱거리지만 제주의 하늘 아래서라면 조금은 자연스러울 수 있다. 4월 중순인데 반팔 입어도 땀이 날 만큼 더웠다. 용눈이오름 금방 다시 만나서 반가웠어~ 이제 카페인 수혈하러 가자.
창밖으로 보이는 밭이 아름다운 카페 편린에 왔다.
아이스 라떼와 당근케익, 한라봉에이드를 시켰다.
한라봉에이드가 상큼+청량했다. 한라봉 과육이 듬뿍 들어갔는데 텁텁함 없이 이렇게 청량할 수가. 카페 편린에 가면 한라봉에이드를 드세요.
카페 편린 앞마당에서 어정쩡한 뒷모습을 남겨본다. 외부가 예뻐서 날이 좀 덜 더우면 마당의 좌식 테이블에서 마셔도 좋을 듯하다.
날이 뜨거워 그늘이 필요했다. 그럼 숲이지. 비자림에 가자.
자주 와 뻔한 듯해도 막상 오면 새롭게 좋은 비자림이다. 작년에 갔을 땐 5월이라 초록이 무르익었는데 4월 중순에 오니 숲이 무르익기 전 여린 연두빛이었다.
단풍나무가 특히 눈에 들어왔다. 차양막처럼 일자로 자란 단풍나무 잎이 그늘을 넉넉하게 만들어주었다.
걸어다니면서 H가 아이들 촉감놀이하듯이 나무 기둥, 잎사귀, 풀잎을 손으로 훑는다. 심지어 발 밑 화산송이 부스러기까지 만져본다.
순간을 오래 기억하는 방법이 있다. 오감으로 담는 거다. 그 순간의 풍경을 눈에 담고, 귀로 들려오는 소리를 듣는다. 풍기는 냄새를 맡고 대상을 만져본다. 먹을 수 있는 게 있다면 맛보는 것까지 해본다.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을 동원해 그 순간을 충분히 느낀다면 기억이 오래 간단다.
비자림에서 살랑거리는 나뭇잎을 보고, 바람소리와 휘파람새 소리를 듣고, 피톤치드 향과 풀냄새를 맡는 일까지는 했는데 나뭇잎과 나무 기둥을 만질 생각은 하지 못했다. 독초나 가시 돋은 풀들을 조심해가며 살살 자연을 만져본다. 행복한 찰나를 오래 간직하기 위한 방식을 덕분에 재발견했다.
비자림의 마스코트 같은 커다란 나무를 지나 숙소로 돌아왔다.
저녁은 포장해 숙소에서 드라마 보며 먹기로 했다. 숙소 근처 오션스토리의 참돔회, 출출의 오징어 튀김, 편의점표 얼큰우동과 맥주다.
온평리는 고즈넉한 동네지만 걸어갈 만한 거리에 맛집들이 은근 있다. 참돔회 꼬득하고, 오징어튀김은 식어도 맛있다. 며칠 전 출출에서 혼자 떡볶이와 김밥 먹을 때, 옆 테이블에서 오징어튀김에 소주 한잔하고 있었다. 오징어튀김이 맛있어 보여 나중에 꼭 먹으리라 생각했는데 오늘 이렇게 먹네.
용눈이오름과 비자림이라는 익숙한 장소에서 계절이 주는 미세한 변화를 느끼고, 찰나를 오래 기억하는 방법을 다시금 떠올린 오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