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살기 9일차: 사는 게 적성에 안 맞아도
여행도 중독이라 도파민 중독처럼 순간 즐겁고 마는 걸까? 돌아오면 다시 일상이다. 일상이 지옥이면 여행은 그저 도피인가?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블로그에 제주살기 기록을 쓰면 그때의 기억들이 생생해진다. 실제로 제주에 있었던 기간은 4월로 끝났지만, 제주살기 기록을 쓰는 동안 내 감각은 언제든 제주로 돌아간다. 여행이 끝나도, 그걸 꺼내 기억하는 동안은 여행 중이다. 나의 도피는 여행으로만 끝나는 게 아닌 셈이다.
일하는 동안 틈틈이 산책을 다니고 점심시간에 일부러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 차 마시는 행위도 도피 아닌가? 도피가 계속되면 일상도 살아볼 만해지지 않을까.
제주살기 9일차 아침 메뉴는 전복멸치주먹밥과 감자수프다. 포실한 감자수프로 입을 따뜻하게 적시고 주먹밥과 샐러드를 먹은 후 요거트로 마무리한다.
오늘도 비가 내린다. 제주에서 비 오면 날씨 좋을 때 밖에서 노느라 하기 어려웠던 일들을 하면 된다. 전시 보기, 숲 산책, 카페에서 책읽기, 숙소에서 뒹굴거리기.
오늘 밤비행기로 H가 온다. 공항에 데리러 가야 하니 체력을 아껴야 해. 성산일출도서관에 가자.
숙소에서 나오자 하귤나무 아래 귤과 털색을 맞춘 고앵이 얌전히 앉아 있다.
첫날 수하리839 앞 온평리 작은 도서관 살짝 들렀는데 도서관이라기보다 작은 사무실에 책 몇 권 있는 느낌이었다. 돌아오는 길 만난 숙소 사장님께 말하니 성산일출도서관이 크고 괜찮다고 추천해주셔서 오늘 가보기로 했다.
도서관 로비의 제주어 일력이 마음에 든다.
궨결치 아니허우다 경헐 수도 싯주마씀만 잘 뒐 거우다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다 잘 될 거에요)
로비에서는 ‘책으로 만나는 오늘의 4.3’이 진행 중이었다. 그 중 만화 <빗창>을 보았다. 항일운동에 제주 해녀가 적극 참여한 역사기록을 바탕으로 그들이 겪었을 4.3을 만화적 상상력으로 그렸다.
제주에서 도서관을 세 군데 방문했는데, 4월이어서 책으로 만나는 오늘의 4.3 전시는 공통적으로 로비에서 진행 중이었다. 성산일출도서관에는 제주자료 서가를 따로 구비했다. 도서관에도 제주만의 특징이 보인다.
창밖을 바라보며 책을 읽을 수 있다. 발 받침대가 있어 신발 벗고 잠시 쉬며 <내 지위는 내가 결정합니다> 슥 훑었다. 이제 커피 마시고 싶다. 전부터 제주가 본점인 도렐에 가보고 싶었어.
아직 비수기 평일이어선지 도렐 제주 본점은 생각보다 한적했다.
쑥하리와 까눌레를 시켰다. 쑥하리 완전 내 스타일. 쌉싸레한 쑥향을 진하게 느끼면서 카페인을 채울 수 있다.
틈날 때마다 비비언 고닉 <짝 없는 여자와 도시>를 읽는다.
사는 게 적성에 안 맞는다. 지난 날의 내가 종종 하던 말이다. 저자의 자조에는 몽상과 이상적인 생각으로 세월을 흘려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만한 통찰이 녹아 있다. 줄곧 스스로 그린 환상 속에 살다 어느덧 텅 비워진 방대한 현재를 맞닥뜨리고, 그 현재를 채워나갈 필요성을 뒤늦게 느껴본 자들 말이다.
이제 남은 것이라곤 오직 텅 비워진 방대한 현재뿐이었다. 이걸 채우는 작업에 진지하게 임하겠다고 그 자리에서 다짐했다. 물론 말이 쉽지. 몽상을 끊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그 긴 세월 해본 적도 없는, 현재를 점유하는 일을 대체 어떻게 해낸단 말인가?
비비언 고닉 <짝 없는 여자와 도시> 중에서
이제 적성에 맞는 일을 해야지. 밥 먹으러 가겠다는 소리. 성산읍내쪽 분식집에 갔다.
떡볶이와 치즈김밥으로 오늘도 가속노화 식단을 챙겨주었다.
숙소로 돌아와 잠시 정비했다. 머무는 중간에 일행이 온다고 하니 수하리839에서 침구를 새로 갈고 방 청소를 해주셨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연박 손님에게 잘 제공하지 않는 서비스인데 고마운 일이다.
조금 일찍 도착해 공항 근처 용두암 쪽에서 잠시 산책하다 H를 만났다. 엄마를 데리러 공항에 가보았지만 이번에는 밤 운전이라 쉽지 않았다. 가로등이 아예 없는 산길을 넘어갈 때와, 도로 한복판에 개들이 대여섯마리 가만히 앉아서 비키지 않을 때 거의 멘탈이 나갔다. 그래도 제주살기하는 나를 보러 연차 내고 와준 사람을 위해 멘탈을 부여잡아야 했다.
숙소 근처 편의점에서 간단한 먹거리와 맥주를 사 환영인사를 하고 잠들었다. 내일부터는 다시 함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