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살기 12일: 꽃도 숲도 버거울 때
아침 비행기로 출발하는 H를 배웅하러 공항에 갔다가 맥모닝을 먹었다. 햄치즈머핀을 씹는데 어쩐지 의욕이 꺾였다. 요 며칠 맑다가 오늘은 날이 꾸물거려서였을까. 날이 흐려도 꽃은 피었을 테니, 제주시 온 김에 겹벚꽃을 보러 가야겠다.
감사공묘역이 겹벚꽃 성지라고 한다. 도착하니 주차장이 따로 없어 길가 한쪽에 긴 주차행렬이 보였다. 나도 끄트머리에 대놓고 들어가본다.
겹벚꽃나무가 여러 그루였다. 흰색, 연분홍색, 진분홍색으로 빛깔도 다양했다. 나무 아래마다 꽃 보러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사람이 많아도 괜찮다. 나는 시간이 많으니깐. 꽃잎이 가득 피어있는 겹벚꽃을 오늘처럼 제대로 본 일이 없었다. 곱구나.
꽃송이째로 똑 떨어져 있는 겹벚꽃 집어 꽃반지 해보고 머리 옆에 꽂아 사진 찍어본다. 금방 배가 고파져 근처 식당을 검색해 점심 먹으러 갔다.
겹벚꽃 본 후 태국음식 먹는 코스다. 규모가 작지 않은데도 타무라는 손님으로 가득했다. 태국 어느 고급식당처럼 매장을 잘 꾸몄다. 1인 손님이라 바 자리에 앉았다. 팟타이 주문하고 태국 생각이 나 타이 아이스티도함께 시켰다. 팟타이에 레몬 듬뿍 짜서 먹고, 타이티 한 모금 하니 조금 힘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이래서 여행 중에 아침을 잘 챙겨먹어야 하는군(?)
이날 비 소식이 없었는데 하늘이 계속 어두웠다. 바로 숙소 가긴 아쉬워 사려니숲 들렀다.
사려니숲 초입은 데크길로 잘 정비되어 있다. 선텐 의자에 잠시 앉아 숲멍했다.
사려니숲 코스를 다 돌려면 전체 10km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인적이 드물고 어둡다. 오늘 나는 혼자니 2km 정도만 걷자.
울창한 숲을 가로지르는 큰길이 있고, 양쪽으로 오솔길이 사이사이 나 있다. 큰길로 걷다 오솔길로 빠져 잠시 걸었다. 중간에 비가 후두둑 쏟아진다. 우산을 가져오지 않아 겉옷에 달린 모자 쓰고 걸었다. 나무가 우산 역할을 해주어 많이 젖지는 않았는데 으슬했다. 사려니숲길은 일행과 함께 와 오래 걷는 편이 낫겠다. 오늘은 아무래도 에너지를 아끼는 날인가보다. 이만 숙소로 돌아가자.
숙소 근처 대형마트인 제스코 마트에 들러 식자재 쇼핑을 했다.
마트에서 계란과 두부, 즉석 우동과 알배추, 토마토 등을 사서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7박을 머물 서귀포시 숙소는 더나은스테이 펜션이다. 제주에서 묵은 숙소 네 곳 중 제일 만족도가 높은 곳이 될 터였다. 조식은 없지만 취사가 가능하고, 1층 세탁실에는 세탁기가 두 대 있다. 세탁실에서 매일 수건 두 장씩 직접 가져다 쓸 수 있고, 무엇보다 양쪽으로 창이 있어 환기가 가능했다.
게스트하우스의 아쉬웠던 부분이 바로 환기였다. 더나은스테이 펜션에서는 아침에 일어나 방 창문을 양쪽으로 열어 바람 통하게 하고, 거실로 나가 창을 열고 부엌 창도 열면 집 전체에 신선한 공기가 들어왔다. 채광도 좋아 빨래 돌리고 건조대 가지고 올라와 하루 널어두면 잘 말랐다. 여기에 머무는 동안 제주에 잠깐 놀러온 게 아니라, 살러 왔다는 사실이 비로소 실감 났다.
김치우동 끓여 후후 불며 거실에서 먹으니 몸이 따뜻해졌다. 우동 먹고 푹 자면 바닥을 친 에너지도 돌아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