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살기 13일: 낯선 평화
그간 제주살기의 동력은 든든한 아침식사에서 얻는 편이었다. 조식을 주는 게스트하우스에서 벗어나 오늘부터 얼마간은 스스로 끼니를 챙겨야 한다. 아침에 일어나 창을 열어 환기하고 음악을 튼 후 식사를 준비해 거실 소파에 앉아 천천히 먹었다.
토마토를 잘게 다져 계란말이 해서 먹었다. 계란이 무려 4개나 들어간 든든한 식사다. 조식 시간에 쫓기거나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를 신경 쓰지 않고 온전히 내 속도에 맞춘 아침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다양한 형태의 아침을 제주에서 경험 중이었다. 오늘은 숙소 근처 감귤박물관으로 첫 일정을 시작하기로 했다.
내가 묵은 서귀포시 효돈동은 겨울에도 포근하여 감귤이 맛있기로 소문난 지역이라고 한다. 감귤박물관이 자리한 지역이니 말 다 했지. 감귤박물관의 나무들은 모두 감귤 나무였다.
감귤박물관 주차장에서는 멀리 서귀포 바다가 보인다. 4월 방문 당시 본관은 공사 중이었다. 관람 가능한 세계감귤전시관에 들어가본다.
세계감귤전시관에는 제주와 세계 각국의 감귤나무들이 원산지별로 구분되어 식재되어 있다.
아기자기한 포토존도 있었고
과실 크기가 2킬로그램에 달하는 만백유라는 베트남 감귤나무도 보였다.
울퉁불퉁한 껍질 모양에 한 번 더 들여다보게 되는 사두감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사두감은 구면인데, 이전에 묵었던 두베하우스 사장님이 맛보라며 주셨었다. 되게 못생겼네, 하며 껍질 까 먹어보니 엄청나게 달고 맛있어서 기억에 남았다. 개량 품종인 줄로만 알았는데 과실 모양이 사자 머리 모양 같아서 사두감이라 불리며 제주도에서 옛부터 재배되어 온 재래 감귤 중 하나라니 반전이다.
감귤전시관을 관람하는 내내 향긋한 냄새가 났다. 귤향인가 싶기엔 달달하고 상쾌한 향이었다.. 전시관을 나와 들어간 기념품샵에서 의문이 풀렸다.
귤꽃향기였다. 귤꽃이 이런 향을 내는구나. 미스트 샘플을 뿌려보니 정말 비슷한 향기였다. 미스트를 살까 하다가 충동적으로 가방을 샀다.
감귤 니트백 9,900원이니 안 살 수 없었다. 핸드크림, 립밤, 핸드폰이 넉넉히 수납된다. 남은 제주살기 내내 잘 들고 다녔고, 돌아와서도 간편하게 외출할 때 애용 중이다.
감귤박물관은 본관이 공사 중인데도 의외로 볼거리가 많았고 뜻밖의 귀염진 아이템도 건질 수 있어 뿌듯했다. 뒤편으로 월라봉 산책로가 있다고 하니 가볍게 올라보자.
순환산책로가 있지만 나는 월라봉 정상까지 가보기로 한다. 정상이라고 해봐야 걸어서 5분에서 10분 남짓이다. 나는 이런 정상을 좋아한다. 최소한의 노력으로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풍경. 제주 오름을 좋아하는 이유도 그래서일까.
조금 오르니 월라봉 정상바위가 보였다. 꽃 아래 놓인 회색 벽돌 하나 밟고 바위 위를 올라가면,
효돈동 마을 풍경과 서귀포 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다. 월라봉은 3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졌는데 달빛이 동쪽으로 솟아있는 봉우리를 훤히 비춘다고 한다. 이곳을 밤에 오르면 환한 달빛의 기운을 받을 수 있을까. 짧은 월라봉 산책이 아쉬워 근처에 가볼만한 곳을 찾아본다. 월라봉에는 효돈구경이라는 표지판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힌트를 얻었다.
트멍길이라는 이름의 마을 사잇길을 소개하는 안내판이다. ‘트멍길’이라는 이름이 얼른 와닿지는 않지만, 서귀포시에 머무는 동안 명소들만 따라다니기 보다는 마을 구석구석을 차분히 다녀보고 싶어 유심히 보았다. 코스 중 감귤박물관과 월라봉, 쇠소깍과 검은모래해변은 이미 방문했다. 게우지코지가 궁금해져 가보기로 했다.
게우지코지 가는 길은 차 한 대 정도 다닐 수 있고 맞은편에서 다른 차가 오면 이면도로 옆쪽으로 재주껏 비켜주어야 했다. 겁이 나 게우지코지 바로 앞까지는 못 들어가겠어서, 하효항에서 게우지코지 가는 길 중간 차 5대 정도 세울 수 있는 주차장이 나오길래 거기에 세우고 걸어갔다.
걸어가는 길 바다가 발길을 사로잡았다. 멀리 하효항의 빨간 등대, 하얀 등대가 보이고 거친 파도가 검은 암석에 부딪쳐 하얀 거품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게우지코지는 전복 내장을 일컫는 ‘게옷’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곳의 형상이 전복 내장 같은 모양이라 붙여졌단다. 생이돌은 커다란 두 개의 암석으로 바다 철새들 쉬는 곳이라 ’생이돌‘이라고 한다. 바위가 하얀 것은 새똥 자국 때문이란다. 기암들이 엮여내는 경치와 탁 트인 전망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동안 제주에 오면 함덕이나 김녕, 우도 바다 같은 에메랄드 바다를 즐겨 찾았다. 게우지코지에서 제주 남쪽 바다의 매력을 처음으로 느꼈다. 남쪽 바다는 거칠고 깊고 푸르렀다. 긴 세월 파도가 깎아내 독특한 형상을 지니게 된 바위들, 그 바위에 종일 부딪쳐 생기는 풍성한 포말이 빚어내는 풍경은 너무나도 야생의 바다였다. 왜 파도를 맥주 거품에 비유하는지 깨달았다. 하얀 거품이 부드러워 보여 두 손 가득 떠 맛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꾹 참고 눈으로 열심히 담았다.
파도를 실컷 보다 정신 차리니 바로 앞 카페가 이제 눈에 들어온다. 창가에 앉으면 또 다시 바다 구경을 할 수 있다.
아이스아메리카노와 쪽파크림 베이글 먹으며 파도에 씻겨나간 당을 채운다.
카페를 나와 보목포구 방면 올레길 6코스를 따라 조금 더 걸었다.
올레길 따라 걷다보면 하효마을회에서 세운 안내석이 곳곳에 놓여 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눈 앞에 신기루처럼 섬이 하나 나타났다.
희미하게 보이다 서서히 나타난 형상이 아니라, 걷다 보니 갑자기 거대한 형상이 뿅 나타난 듯했다. 지도를 찾아보니 섶섬이다. 처음 인식하고 나니, 이후 서귀포 어딜 가든 이 섬이 보였다. 섶섬을 알고 나니 그 옆의 문섬도 눈에 들어왔다. 성산쪽에 머물면서는 성산일출봉을 멀리서 보고, 가까이서 보고, 올라가도 보면서 더이상 그 장소가 막연하지 않게 느껴졌었다. 효돈동에 머무는 동안 서귀포 바다에 이정표처럼 떠 있는 섶섬이 이제 그런 대상이 될 모양이었다. 내가 이 동네에 정 붙이게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길, 분명 나는 바당 올레를 걷고 있는데 숲의 청량함이 느껴진다. 올레길 걷기는 제주에서 돈 덜 들이고 멋진 시간을 보내는 좋은 방법이다. 서귀포 남쪽은 야자수도 거대하다. 오늘 종일 귤나무와 바다와 야자수를 보며 직전에 머문 온평리와는 또 다른 평화를 느꼈다. 내가 알던 제주가 아니라, 다른 나라에 있는 제주에 머무는 것 같다. 그런 말이 가능할 수 있다면, 낯선 평화라 이름 붙이고 싶다. 아무도 나를 모르고 풍경은 처음 접하는 것 투성인 타국에서 머물 때 느끼는 안도감을 제주에서 느꼈다.
낯선 나라 서귀포시라고 했지만 페리카나 치킨이 있다는 점에서 나는 여전히 한국에 머무르고 있다. 떡볶이와 치킨으로 더할 나위 없는 하루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