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느긋하게 3주 살기

제주살기 14일: 서귀포의 환상

by 달문


제주살이를 돌이켜보면 손에 꼽힐 정도로 좋았던 날들이 몇 번 있었다. 혼자 지내며 매일 행복하기만 했다면 거짓말이고 오늘 기록할 14일부터 17일차까지가 황금기였던 것 같다. 제주에 머문 지 두 주가 넘으며 긴장되고 낯선 기분은 지나가고, 내가 여기에 정말 존재하고 있다는 생생함에 젖어들 수 있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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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보니 한라산이 제법 잘 보였다. 날씨가 맑을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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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이버섯 넣은 두부김치 먹고 밀린 빨래 널은 뒤 길을 나섰다. 더나은스테이 펜션에서 정방폭포가 차로 10분 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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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방폭포 물줄기가 거셌다. 폭포 바로 근처까지 접근이 가능해 바위 위를 걸어다니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물줄기에 샤워하고 싶을 정도로 볕이 뜨거워 나도 근처로 가 튀기는 물방울을 일부러 조금 맞았다. 중년 커플이 폭포 앞에서 사진을 함께 찍고 싶어하시는 것 같아 그 앞을 얼쩡거리다 찍어드리고 내 독사진도 부탁했다. 사진 품앗이 스킬이 점점 발전한다. 물론 그냥 ‘저 좀 찍어주세요’ 하면 간단하지만 그건 부끄러우니깐 자연스러운 흐름을 타야 해. 4월 중순이 이렇게 무더웠던가. 정방폭포 산책만으로 지쳐서 우선 도너츠 먹으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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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또 도넛에서 아이스 라떼와 흑임자도넛, 풋귤도넛을 먹었다. 풋귤도넛은 상큼달큼하고 흑임자도넛이 아주 당 충전되는 맛이었다. 여기 도넛들이 다 맛있어보여 하나 더 먹을까했는데 그러다간 나의 빵 섭취량이 하루 3개로 늘 것 같아 자제했다. 먹고 나니 이중섭 미술관을 보러갈 마음도 먹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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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옆 이중섭 거주지에 먼저 들렀다. 가족들과 피난 생활을 보냈던 곳이다. 1.4평 이 작은 방에서 식구들 숨소리 들으며 잠들고 먹을 게 없어 고구마와 게를 먹으며 지냈다. 그의 인생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단다. 이중섭의 서귀포 그림들은 어느 남쪽 나라 이상향을 그려낸 듯 보였는데, 두 평도 되지 않는 방에서 광활한 행복을 느꼈기에 가능한 작품들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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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와 물고기>. 엽서에 그린 엽서화다. 엽서에 글 없이 그림만으로 마음을 담았다. 글작가는 문장으로, 화가는 그림으로, 가수는 음악으로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마음을 표현할 테다. 파도 위 튀어오르는 물고기가 말 거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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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과 게>. 그가 자주 먹은 게에 대한 미안함으로 그렸단다. 그럼 꽃은? 이중섭 거주지 바로 앞 벚꽃나무가 서 있던데, 이 꽃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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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을 여행하면서 그 지역에 산 사람의 작품을 보는 일은 특별하다. 내가 올레길이나 숙소 주변을 걸으며 지나친 순간의 풍경들이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중섭미술관 2층으로 올라가 제주 작가들의 그림을 보며 여실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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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고순철 작가의 <달의 정원>이 인상적이었다. 커다란 캔버스에 바닷가 염생식물을 생생하게 담았다. 이제 나는 이 풍경을 안다. 며칠 전 올레길 6코스와 7코스를 걸으며 보았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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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 풍경 말이다. 고순철 작가는 바닷가 염생식물의 강인함에서 해녀였던 어머니의 삶을 그림으로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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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미술관 1층은 이중섭의 작품, 2층은 제주 작가 작품, 3층은 전망대였다. 전망대에서 섶섬과 문섬이 보였다. 그리고 이중섭은 <섶섬이 보이는 풍경>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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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일층으로 내려와 기념품을 구경하다 내 방 벽에 오래 걸려 있는 <서귀포의 환상>을 보니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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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친구가 이중섭 미술관에 다녀왔다며 사다준 액자인데 여기에서 보니 남다르다. 이 그림 덕분에 나는 서귀포에 와보지 않고서도 따뜻하고 은은한 감귤빛으로 서귀포를 상상하며 지냈다. 그리고 와 보니 실제로 그런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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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거리를 둘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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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극장 주변을 어슬렁거리자 맞은편 상점에서 “들어가보세요. 무대가 예쁘고 옆에 창으로 바다가 보여요.”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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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아름다운 무대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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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창을 들여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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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창한 나무 뒤편으로 바다가 희미하게 보였다. 현지인 이야기는 듣는 편이 낫습니다. 안 들어도 사실 상관없지만 보고 지나가면 더 행복해지거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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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거리의 가로등과 바닥, 조형물까지 특색 있다. 노천 카페에서는 외국인들이 낮부터 와인을 마시고 있는데 아니 여기가 캘리포니안지 서귀포인지?

이제 볕이 좀 덜 뜨거워져서 근처 천지연 폭포까지 들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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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창한 난대림이 사방으로 둘러싼 천지연폭포로 들어가는 길은 신화 속 풍경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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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하면 공식 안내판에 이 난대림을 두고 ‘신들에게는 고향인 하늘세계와 비슷한 휴식공간을 필요로 했다’라고 써두었다. 안내문구에 쓰기엔 너무 감성적인 말 아닌가 싶지만, 실제 걸어보니 이런 말로나 설명이 가능하다. 천지연폭포를 둘러싼 난대림은 ‘옥황상제가 특별히 가꾸던 정원‘을 내려보낸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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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팔수 나무 그늘 아래 앉아 거센 폭포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나무 틈으로 보이는 하늘이 여우가 옆으로 뛰어가는 듯하다.

천천히 걸으며 나무와 꽃, 물에 비친 반영 등 사진 찍는데 어떤 할아버지와 동선이 계속 겹친다. 급기야 서로 사진 찍는거 기다렸다가 다음 장소로 이동하고 내가 안 찍고 넘어가면 “그거 찍으면 멋지게 나와요” 하심.ㅋㅋ확실히 내 관심사나 즐겨 가는 곳들의 교집합을 따라가보면 최소 오십대다. 친구에게 말하니 너 나이에 맞게 살으라는데, 이십대 후반부터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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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하르방 마트료시카를 지나 천지연 폭포를 나오니 새연교까지 길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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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가 이렇게 아름다울 일인가? 내 서귀포 뽕은 계속되었다. 외돌개에 갔을 땐 거기가 제주 일경이었고 게우지코지에선 이런 비경은 처음이야 싶더니, 천지연폭포에서 신들의 정원이 바로 이거구나 하고 서귀포항에 오자 또 천하제일 미항이 여기 있다며 벅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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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연교 위에서 문섬 오른편으로 해 지는 풍경을 본다. 바다에서 숭어인지 물고기가 펄떡 뛴다. 이중섭미술관에서 본 파도와 물고기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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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식사는 라볶이와 제주 유산균 막걸리다. 유산균 막걸리 뚜껑에 비밀이 있다. 초록 뚜껑이 우리 쌀, 흰 뚜껑은 수입 쌀로 만든단다. 일부러 하나로마트 가서 초록 뚜껑 찾아 사왔다. 잔에 따르면 기포가 보글보글 올라온다.

만약 누군가 제주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하루 코스를 추천해달라고 하면, 이중섭거리와 천지연폭포+새연교를 권하고 싶다. 유명 관광지는 유명한 이유가 있다. 넌 이제 알았니 난 다 아는데? 하면 할말없음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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