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문 Jun 15. 2024

제주에서 느긋하게 3주 살기

제주살기 14일: 서귀포의 환상


제주살이를 돌이켜보면 손에 꼽힐 정도로 좋았던 날들이 몇 번 있었다. 혼자 지내며 매일 행복하기만 했다면 거짓말이고 오늘 기록할 14일부터 17일차까지가 황금기였던 것 같다. 제주에 머문 지 두 주가 넘으며 긴장되고 낯선 기분은 지나가고, 내가 여기에 정말 존재하고 있다는 생생함에 젖어들 수 있던 시간이다.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보니 한라산이 제법 잘 보였다. 날씨가 맑을 모양이었다.

팽이버섯 넣은 두부김치 먹고 밀린 빨래 널은 뒤 길을 나섰다. 더나은스테이 펜션에서 정방폭포가 차로 10분 거리였다. 

정방폭포 물줄기가 거셌다. 폭포 바로 근처까지 접근이 가능해 바위 위를 걸어다니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물줄기에 샤워하고 싶을 정도로 볕이 뜨거워 나도 근처로 가 튀기는 물방울을 일부러 조금 맞았다. 중년 커플이 폭포 앞에서 사진을 함께 찍고 싶어하시는 것 같아 그 앞을 얼쩡거리다 찍어드리고 내 독사진도 부탁했다. 사진 품앗이 스킬이 점점 발전한다. 물론 그냥 ‘저 좀 찍어주세요’ 하면 간단하지만 그건 부끄러우니깐 자연스러운 흐름을 타야 해. 4월 중순이 이렇게 무더웠던가. 정방폭포 산책만으로 지쳐서 우선 도너츠 먹으러 왔다.

오또 도넛에서 아이스 라떼와 흑임자도넛, 풋귤도넛을 먹었다. 풋귤도넛은 상큼달큼하고 흑임자도넛이 아주 당 충전되는 맛이었다. 여기 도넛들이 다 맛있어보여 하나 더 먹을까했는데 그러다간 나의 빵 섭취량이 하루 3개로 늘 것 같아 자제했다. 먹고 나니 이중섭 미술관을 보러갈 마음도 먹어진다.

미술관 옆 이중섭 거주지에 먼저 들렀다. 가족들과 피난 생활을 보냈던 곳이다. 1.4평 이 작은 방에서 식구들 숨소리 들으며 잠들고 먹을 게 없어 고구마와 게를 먹으며 지냈다. 그의 인생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단다. 이중섭의 서귀포 그림들은 어느 남쪽 나라 이상향을 그려낸 듯 보였는데, 두 평도 되지 않는 방에서 광활한 행복을 느꼈기에 가능한 작품들이었나 보다. 

<파도와 물고기>. 엽서에 그린 엽서화다. 엽서에 글 없이 그림만으로 마음을 담았다. 글작가는 문장으로, 화가는 그림으로, 가수는 음악으로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마음을 표현할 테다. 파도 위 튀어오르는 물고기가 말 거는 듯하다.

<닭과 게>. 그가 자주 먹은 게에 대한 미안함으로 그렸단다. 그럼 꽃은? 이중섭 거주지 바로 앞 벚꽃나무가 서 있던데, 이 꽃일 수도 있겠다.

지역을 여행하면서 그 지역에 산 사람의 작품을 보는 일은 특별하다. 내가 올레길이나 숙소 주변을 걸으며 지나친 순간의 풍경들이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중섭미술관 2층으로 올라가 제주 작가들의 그림을 보며 여실히 느꼈다.

특히 고순철 작가의 <달의 정원>이 인상적이었다. 커다란 캔버스에 바닷가 염생식물을 생생하게 담았다. 이제 나는 이 풍경을 안다. 며칠 전 올레길 6코스와 7코스를 걸으며 보았던 모습이다. 

위와 같은 풍경 말이다. 고순철 작가는 바닷가 염생식물의 강인함에서 해녀였던 어머니의 삶을 그림으로 담았다. 

이중섭 미술관 1층은 이중섭의 작품, 2층은 제주 작가 작품, 3층은 전망대였다. 전망대에서 섶섬과 문섬이 보였다. 그리고 이중섭은 <섶섬이 보이는 풍경>을 남겼다.

다시 일층으로 내려와 기념품을 구경하다 내 방 벽에 오래 걸려 있는 <서귀포의 환상>을 보니 반가웠다.

오래전 친구가 이중섭 미술관에 다녀왔다며 사다준 액자인데 여기에서 보니 남다르다. 이 그림 덕분에 나는 서귀포에 와보지 않고서도 따뜻하고 은은한 감귤빛으로 서귀포를 상상하며 지냈다. 그리고 와 보니 실제로 그런 곳이었다. 

이중섭 거리를 둘러보자. 

낡은 극장 주변을 어슬렁거리자 맞은편 상점에서 “들어가보세요. 무대가 예쁘고 옆에 창으로 바다가 보여요.”하신다. 

이렇게 아름다운 무대라고요..? 

옆에 창을 들여다보자 

울창한 나무 뒤편으로 바다가 희미하게 보였다. 현지인 이야기는 듣는 편이 낫습니다. 안 들어도 사실 상관없지만 보고 지나가면 더 행복해지거든용

이중섭 거리의 가로등과 바닥, 조형물까지 특색 있다. 노천 카페에서는 외국인들이 낮부터 와인을 마시고 있는데 아니 여기가 캘리포니안지 서귀포인지? 

이제 볕이 좀 덜 뜨거워져서 근처 천지연 폭포까지 들르기로 했다.

울창한 난대림이 사방으로 둘러싼 천지연폭포로 들어가는 길은 신화 속 풍경 같았다. 

오죽하면 공식 안내판에 이 난대림을 두고 ‘신들에게는 고향인 하늘세계와 비슷한 휴식공간을 필요로 했다’라고 써두었다. 안내문구에 쓰기엔 너무 감성적인 말 아닌가 싶지만, 실제 걸어보니 이런 말로나 설명이 가능하다. 천지연폭포를 둘러싼 난대림은 ‘옥황상제가 특별히 가꾸던 정원‘을 내려보낸 게 분명하다.

담팔수 나무 그늘 아래 앉아 거센 폭포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나무 틈으로 보이는 하늘이 여우가 옆으로 뛰어가는 듯하다.

천천히 걸으며 나무와 꽃, 물에 비친 반영 등 사진 찍는데 어떤 할아버지와 동선이 계속 겹친다. 급기야 서로 사진 찍는거 기다렸다가 다음 장소로 이동하고 내가 안 찍고 넘어가면 “그거 찍으면 멋지게 나와요” 하심.ㅋㅋ확실히 내 관심사나 즐겨 가는 곳들의 교집합을 따라가보면 최소 오십대다. 친구에게 말하니 너 나이에 맞게 살으라는데, 이십대 후반부터 이랬다..

돌하르방 마트료시카를 지나 천지연 폭포를 나오니 새연교까지 길이 이어진다.

항구가 이렇게 아름다울 일인가? 내 서귀포 뽕은 계속되었다. 외돌개에 갔을 땐 거기가 제주 일경이었고 게우지코지에선 이런 비경은 처음이야 싶더니, 천지연폭포에서 신들의 정원이 바로 이거구나 하고 서귀포항에 오자 또 천하제일 미항이 여기 있다며 벅찼다. 

새연교 위에서 문섬 오른편으로 해 지는 풍경을 본다. 바다에서 숭어인지 물고기가 펄떡 뛴다. 이중섭미술관에서 본 파도와 물고기가 떠오른다. 

저녁식사는 라볶이와 제주 유산균 막걸리다. 유산균 막걸리 뚜껑에 비밀이 있다. 초록 뚜껑이 우리 쌀, 흰 뚜껑은 수입 쌀로 만든단다. 일부러 하나로마트 가서 초록 뚜껑 찾아 사왔다. 잔에 따르면 기포가 보글보글 올라온다. 

만약 누군가 제주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하루 코스를 추천해달라고 하면, 이중섭거리와 천지연폭포+새연교를 권하고 싶다. 유명 관광지는 유명한 이유가 있다. 넌 이제 알았니 난 다 아는데? 하면 할말없음ㅎㅎㅎ 







작가의 이전글 제주에서 느긋하게 3주 살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