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살기 15일: 키 큰 나무 사이로
오늘은 예약 일정이 있다. 매여 있는 게 싫어서 혼자 지내는 동안은 되도록 마음과 몸이 가는대로 돌아다니는 중이었지만, 서귀포 치유의 숲에서 운영하는 산림치유프로그램만은 꼭 참여해보고 싶었다. 며칠 전 시켜먹고 남은 치킨과 토마토로 간단히 아점 먹고 길을 나선다.
https://eticket.seogwipo.go.kr/contents?bmcode=heel
서귀포 치유의 숲 산림치유 프로그램은 2만원이고 위 사이트에서 예약 가능하다. 치유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치유의 숲 입장을 위해서는 예약이 필수다. 덕분에 번잡하지 않은 숲을 고요히 걸을 수 있다. 걷는 일정이니 편한 신발 신고 오라는 산림치유 지도사님의 안내 전화를 받고 등산화 신었다.
귀여운 입구를 지나 방문자 센터에서 오늘 함께할 프로그램 참여자 네 분과 산림치유지도사를 만났다. 나를 보고 ‘생기 넘치는데 무슨 치유가 필요해~’ 하시는 네 분이었다. 스무 살 이후로 처음 들어본다. 어딜 가나 매가리 없다는 소리를 듣는데요. 이날 산림치유 프로그램 참여자 연령대가 평균 오십대 초반이라 벌어진 일이다. 그런데 이 기분 너무 오랜만이라 나쁘지 않아. 치유의 숲은 가벼운 차림으로 걷는 게 좋다고 해서 물병 든 배낭도 차에 두고 폰 하나만 들었다. 프로그램 본격 시작이다.
물병이 필요없다고 하신 이유는 숲 곳곳에 이런 샘(?)이 있기 때문이다. 한 명씩 두 손 모아 샘물 받아 후루룩 마셨다. 숲길을 걷다 중간에 멈추어서 잠시 걷는 법과 숨 쉬는 법을 배우는 시간을 가졌다.
숨 쉴 때는 마시기보다 내쉬기가 중요하다. 호흡을 내쉴 때 배를 천천히 집어넣어보라고 하셨다. 그러면 마시는 행위는 저절로 따라온다. 돌아와서 긴장되거나 운동할 때 호흡이 가빠지는 순간에 가만히 숨을 뱉으며 아랫배를 안으로 쑤욱 집어넣으면 확실히 편해졌다.
프로그램 시작할 때 각자 지팡이 하나씩 주셨다. 오르막에서 땅을 짚고 걸으면 편하고, 등 뒤로 지팡이를 보내 가로로 길게 잡고 걸으면 굽은 어깨와 등이 펴졌다. 멈춰서서 다같이 지팡이 스트레칭도 해보았다. 지팡이의 끝과 끝을 양손으로 잡고 어깨를 지나 등 뒤로 한쪽씩 넘기고, 다시 한쪽씩 가슴쪽으로 돌아오는 자세였다. 어깨가 아주 시원했다. 그때는 이건 집에서도 자주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잊고 있었다. 지금 한 번 해야지.
각자 이 숲 안에서 부를 이름을 정했다. 나는 제주에서 많이 들은 휘파람새 소리가 좋아 휘파람으로 하고 싶었는데 지도사님이 휘파람이라고 하셔서, 동백이 눈에 보이길래 동백으로 했다. 그러고 나니 다른 참여자가 본인이 동백하려고 했다고 아쉬워하신다. 순서의 함정이다. ㅎㅎㅎ 그래서 각자 이름은 휘파람, 동백, 바람, 동백꽃이 되었다. 어쩐지 둘둘이 비슷한 느낌의 이름들이 다. ‘동백님은 제주 온 지 얼마나 되셨어요?’라고 물으셔서 답하는데 속세의 신분과 이름을 숨기고 비밀 게임에 참여한 사람들 간의 대화 같았다.
서로 이름과 치유의 숲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유를 밝히고 (‘저는 생각이 너무 많아서요, 머리가 깨끗해지고 싶은 동백입니다’) 한참 숲길을 걸었다. 중간에 키 큰 나무들의 숲에 진입해 잠시 쉬는 동안 지도사님이 박노해의 시를 들려주셔서 눈 감고 들었다.
키 큰 나무 사이를 걸으며 나는 울었다.
내가 너무 작아서, 내가 너무 약해서,
키 큰 나무 숲은 깊고 험한 길이어서.
키 큰 나무 사이를 걸으며 나는 웃었다.
내 안에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고 강하고 고귀한 내가 있었기에.
키 큰 나무 사이를 걸으며 나는 알았다.
키 큰 나무 사이를 걸어온 사람이
키 큰 나무 숲을 이루어간다는 걸.
‘키 큰 나무 사이를 걸으니 내 키가 커졌다.’
박노해, ‘키 큰 나무 사이로‘
옹이 진 나무를 보고 바람님인지 동백꽃님인지 말했다. “우리처럼 옹이가 많이 졌네.” 그리고 나를 향해 동백님은 별로 옹이 진 게 없어 보인단다. 그러자 또 누군가가 “옹이 져서 제주에 왔다잖아~”하신다. 한편 앞으로 체력이 걱정이지만 우선 살면서 오십대인 지금이 가장 편안한 시기라고도 하신다. 네 분의 대화를 들으면서 그저 즐겁고 새로웠다. 옹이 투성이라고 느끼는 나를 누군가는 아직 어린 나무로 본다. 인생의 전성기가 이삼십대가 아니라 훨씬 더 이후라고 이야기하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는 중이다.
다시 숲길을 걸어 산림치유 프로그램을 위해 마련된 공터에서 요가매트 깔고 스트레칭 했다. 스트레칭 후 싱잉볼 명상을 하고 나니 오래 걷느라 피로해진 몸이 다시 회복되었다.
그리고선 지팡이로 약간의 레크레이션 게임을 했는데, 각자 지팡이 세우고 서 있다가 박수를 치고 옆자리로 넘어가 옆 사람의 지팡이를 잡는 게임이었다. 박수는 한 번, 두 번, 세 번까지 늘어났다. 지팡이를 쓰러뜨리지 않고 옆자리로 넘어가는 게 생각보다 집중력과 순발력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너무 신났다. 숲에서 이런 게임을 하니 수련회에 온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는 맨발 걷기를 하였다. 해변에서만 맨발로 걸어봐서 살짝 무서웠는데, 부엽토로 어느 정도 푹신푹신하게 정비한 곳이니 여기서만은 안심하고 걸어보라고 하셨다. 또 지도사님 왈, ‘동백님처럼 생각 많은 분들은 머리가 뜨거운데, 이렇게 숲을 맨발로 걸으면 머리를 식혀주기 때문에 더 필요해요’라고 말씀해주셨다. 실제로 발바닥의 촉감에 온 신경을 쓰며 걷는 행위에 집중하다 보니 머리가 깨끗해지는 듯했다.
맨발걷기로 더러워진 발을 족욕장에서 씻어냈다. 따뜻한 물과 아로마오일로 발을 씻어낸 후,
차 명상 시간을 가졌다.
차 따르는 소리에 집중하고, 차의 빛깔을 눈으로 본 후 향을 느끼다 머금은 후 삼킨다. 숲에서 세 시간여를 머무르며 그야말로 치유했다. 프로그램이 끝나자 나더러 더 맑아진 것 같다고 하셨고 스스로도 그렇게 느꼈다. 멋진 분들과 치유 프로그램을 함께할 수 있어 오늘도 나는 럭키였다.
슬슬 출출해져오네. 삼매봉 도서관 옆에 있는 식당이 괜찮다고 들어서 가보기로 했다.
삼매봉 도서관 옆에는 기당미술관도 있다. 도서관 옆 미술관이라니 여긴 꿈의 도시인가. 서귀포에서만 쭉 살아보고 싶어졌다. 도서관과 바다와 한라산과 미술관이 지척에 있다니 말이 안 된다. 시간이 늦어 미술관에는 못 들어가고 도서관 살짝 구경했다.
도서관 자체 프로그램으로 고민 해우소가 진열 중이었다. 고민의 숫자에 맞는 책으로 약 처방을 해주는 식이다. 글쓰기를 잘하고 싶다는 고민을 고르면 은유의 <글쓰기의 최전선>이 처방된다. 조금 읽다 너무 배고파져 삼매봉153 식당으로 향했다. 도민 맛집이라는데 백짬뽕과 영귤 탕수육이 각각 8천원 정도였던 것 같다. 가격이 저렴하고 배도 고프니 두 개 다 시킨다.
맛있다. 영귤탕수육 새콤해서 덜 느끼하고 백짬뽕은 약간 쌀국수 느낌이다. 찾아보니 지금은 식당 재정비 중이신지 6월 30일까지 휴무라고 한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삼매봉 도서관에서 책 읽다 삼매봉153에서 식사 후, 기당미술관에서 전시 봐야겠다. 현지인 코스 느낌~
해가 져 흐릿한 한라산을 바라보며 이제 숙소로 돌아간다. 알차고 배부른 오늘 하루도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