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살기 21일: 비 오는 제주에서 (제주살기 끝)
오늘이 제주에서 온전히 하루를 보내는 마지막 날이다. 역시나 비가 내리지만 괜찮다. 오늘부터 제주도립미술관에서 이건희 컬렉션 <시대유감> 전시를 진행한다. 한라수목원-제주도립미술관 코스로 다시 가보자. 지척에 있어 두 곳을 함께 들르면 좋다.
한라수목원에 가득 핀 노란 메리골드와 여전히 반가운 빨간 길을 지나 산림욕장으로 들어간다. 안개 헤치고 괭이오름 정상에 올랐던 이틀 전에는 아무것도 식별할 수 없었는데 오늘은 상황이 좀 나으려나?
괭이오름 정상에서 한라산이 제법 보인다. 산자락의 나무와 숲이 가까워 한라산의 정기가 전해지는 듯했다. 정상에 서서 스트레칭하며 나무들을 바라본다.
옹이가 잔뜩 진 나무를 바라보는데 어디서 직박구리가 운다. 직박구리 소리는 흔히 듣는 '짹짹' 지저귀는 새소리와 구별된다. '삐익'이나 '찌익'에 가까워 귀청이 따갑다. 문득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런 건 다 사람의 생각이에요." 치유의 숲에서 만난 지도사님이 말했다.
직박구리 소리가 시끄럽다고, 옹이가 보기 싫다고 하는 것들은 사람의 시선으로 자연을 보는 일이에요
사람의 시선으로 보지 말고 자연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마음을 가져보자. 제주를 벗어나고 나니 마음처럼 쉽지 않다.
한라수목원 주차장 옆 엔제리너스 카페에서 크로플과 따뜻한 아메리카노 마시며 잠깐 쉬어준다. 창밖 수목원 나무들이 푸르다.
이틀 만에 다시 온 제주도립미술관이다. 입장료는 어린이 500원, 청소년과 군인 1,000원, 성인 2,000원이다.
이건희 컬렉션 한국 근현대미술 특별전 개최일이었다. 관람객이 꽤 있었지만 평일이고 비가 와선지 작품 감상에 어려움이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한국근현대미술 대표 작가 40명의 작품 82점을 4개의 섹션으로 구성한 전시였다. 제주에서 여유롭게 이 전시를 볼 수 있다니, 게다가 떠나기 전에 딱 개최되다니, 역시 운이 좋다. 날이 맑았으면 돌아다니느라 여기 오지 않았을 테니 비 오는 일마저 괜찮다.
방에 걸어두고 싶다. 밤풍경이 이렇게 청초할 일인가. 나는 이번에 강요배를 처음 알았는데 제주 출신 작가라고 한다. 억새꽃과 달이 그려진 밤하늘이 아찔하게 아름다워 한참 그림 앞에서 서성였다.
권옥연도 인상적이었다. 새가 이렇게 꼿꼿할 수 있나. '긴장하지 않으면서 이렇게 똑바른 새는 드물어요?' 오른쪽 아래에는 해를 새가 낳은 알처럼 덩그러니 그렸다.
김창열의 <회귀>도 여기서 다시 만났다.
2층으로 올라가니 제주도립미술관 소장 전시가 진행 중이었다. <가냥하곡 거념하곡>이라는 전시였다. 제목은 잘 지키고 보살피며 돌본다는 의미를 가진 제주어다. 제주미술을 생각하는 도립미술관의 정신이 느껴진다.
제주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 이제 각별하다. 온평리 사람들이라는 작품을 보는데 거기 그려진 해녀들이 꼭 내가 아는 주민들 같다. 제주살기 중 5일 동안 머물렀던 온평리가 떠오른다. 나는 이제 거기 마을길과 주민센터와 동네 바다를 안다.
아름답고 놀라움을 주는 작품들을 잔뜩 보니, 미적 감성과 정신이 가득 채워졌다. 이제 제주를 떠나도 여한이 없었다. 제주시로 넘어와 보낸 시간들이 기대와 다를 때도 있었지만 오늘 이 전시를 보고 그냥 다 괜찮아졌다.
제주살기의 마지막 저녁식사는 떡볶이와 순대로 장식했다. 정신의 허기를 해결했으니 몸의 허기도 메운다.
마지막 날은 바로 떠나야 했다. 체크아웃 후 차량 탁송업체 기사님을 만나 차를 보냈다.
내내 비가 오더니 오늘은 해가 쨍쨍이다. 3주 동안의 제주살이 기록은 오늘로 끝났다. 시작할 땐 이렇게 오래 붙잡고 있을 줄 몰랐다. 쓰다보면 당시 기억들이 생생하게 떠오르는데 그 순간순간이 소중해 빼놓고 쓰고 싶지 않았다. 신기하게 적는 동안 내 기분이 여행 중의 나와 동기화되었다. 현실이 별로일 때 제주살기 기록으로 도피하는 날도 있었던 것 같다. 그날의 내가 즐거우면 기록하는 나도 웃었다. 지금의 나는 다행히 미소를 짓고 있다. 비로소 제주를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제주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