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느긋하게 3주 살기

제주살기 20일: 다시 여기 바닷가

by 달문

비가 내리지 않는다. 비로소 오늘이다. 곽지해수욕장부터 애월카페거리까지 이어지는 해안산책로를 걷는 날. 제주시에 머무는 4일 동안 그 거리만은 꼭 밟고 싶었다. 연이은 비 때문에 못 갈 줄 알았는데 다행이다.

한담해안산책로는 십여년 전 처음 걸었다. 전 회사 워크숍에서 제주통 선배가 안내해주었는데, 이때만 해도 덜 알려졌어서 고즈넉했다. 조용하고 얕은 에메랄드 바다를 끼고 걷는 산책로에 반했던 기억이다. 이제는 웬만한 과거는 떠올렸다 하면 10년 전을 훌쩍 넘긴다. 그 사이 애월 카페거리가 유명해지고 곽지 잠녀의 길, 장한철 산책로 등 이름을 붙인 길들이 그 안에 포함되었나 보다.

곽지해수욕장 근처 주차장은 전부 유료여서 빙빙 돌다 곽지재활용도움센터 앞 주차장을 발견했다. 널찍하고 무료였다.

주차하고 곽지해수욕장을 지나 걷기 시작한다. 날이 흐린데 바다가 에메랄드일 수 있나?

제주 올레길을 알리는 리본이 여기에도 나부낀다. 제주 올레 15코스인가 보다.

곽지 잠녀의 길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도 통과한다. 이름 붙이는 일이 중요하구나.

바다와 검은 돌들 옆으로 산책로가 잘 깔려 있다. 곽지해수욕장에서 출발할 때는 인적이 드물다가 장한철 생가쪽으로 갈수록 사람이 많아졌다. 완만하고 평탄해 걷기에 부담이 없으니 노인분들도 많았다. 다들 편안하고 즐거워 보여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장한철은 제주 출신 선비로 과거 보러 배를 탔다가 폭풍으로 표류해 고초를 겪고 류쿠제도(오키나와) 등에 머물며 있었던 일을 일기 형식으로 썼다. 29명 중 8명만이 살아남았을 정도로 사경을 헤매던 항해였는데 이를 기록으로 남기니 오늘날까지 전해지네. 목숨 걸고 떠돌던 기록은 표해록이 되었다. 방황이 일상인 나도 뭐라도 남기는 중이다.

애월카페거리를 헤매다 해지개에 안착했다. 비수기인데도 카페들은 사진 찍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곧 성수기가 오면 더 활발해지겠다.

널찍한 카페 구석에 앉아 현무암 어쩌고 빵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먹었다. 곽지재활용도움센터부터 여기까지 2.3킬로미터 걸었다. 곽지에서 시작해 산책로 걷고 애월카페거리에서 커피 마신 후 다시 돌아가면 왕복 4.6킬로다. 중간에 에너지 충전도 가능하니 괜찮은 산책 코스인 듯하다.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가는 길에 들린 대화. 한 아저씨가 "어머님 여기 사진 너무 잘 나오는데요?"하자 어머니가 "그래서 뭐, 어쩌라구"하신다. 무뚝뚝 그 자체여서 내가 다 상처 받고 있는데 "저기 서 보세요, 돌 위에" 말하니 어머님 얌전히 돌 위로 올라가신다. ㅋㅋㅋ그냥 사진 많이 안 찍어서 쑥스러우셨나 보다.

돌아오는 길 바다가 반짝반짝 빛난다. 카누 빌려주는 업체도 성업 중이었다.

돌아가면 많이 그리울 풍경이다. 검은 밭담과 풀과 꽃들

백사장 덮개를 뚫고도 풀과 꽃들이 어디서나 자라고 있었다. 그런 풍경들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섬의 서쪽 바다를 더 보고 싶어 협재로 향했다.

협재 근처에서 밥 먹고 비양도를 바라보며 조금 걷다가,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길 구엄리 돌염전에서 노을을 감상했다.

‘누군가가 말했다지 슬픔은 노을을 좋아해 하지만 우리들은 아직 기억해 그 평화’
_장필순 <애월낙조>

https://youtu.be/gaR3HjW0loE
노을을 바라보면 영문 모를 애수에 잠기지만 장필순의 노랫말처럼 평화도 함께 온다. 이번 제주살기 동안 마지막으로 보게 될 바다였고 노을이었다. 아쉬움 없이 젖어들다 캄캄해진 후에야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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