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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돈 Oct 09. 2018

잠잠히 빛나던 별이 어엿한 행성계를 이루다

정규 9집 'glow forever' (2018) - The Quiett

힙합을 동경했던 평범한 한 소년이 있었다. 힙합이 삶을 살아가는 유일한 동기였던 그는 동료들을 모아 열정과 패기만으로 컴필레이션 앨범을 낸다. 이 앨범을 필두로 그는 성공을 이루었고, 래퍼이자 비트메이킹 프로듀서로서 대한민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별으로 우뚝 선다. 하지만 대한민국 힙합신의 한계를 절감한 그는 자신이 일군 땅을 박차고 나와 해외 트렌드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레코드를 설립하여 음악적 방향을 급격히 선회한다. 기존 팬들의 반발도 있었지만 그는 힙합이 머지않아 대한민국 음악의 트렌드가 될 것이라는 시류를 정확히 짚어내었고, 이어 본 레코드사의 앤썸으로 일컬어지는 트랩 장르의 곡을 대중적으로 히트시킨다. 계약서 따위 존재하지 않는 독자적인 음악 제작구조와 왕성한 콘서트 투어 활동은 그에게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었고, 그는 어느덧 젊은이들이 선망하는 영 앤 리치 셀러브리티로 자리매김한다. 남부럽지 않은 부와 명성의 최대치를 이미 젊은 나이에 달성한 그이지만, 그는 이에 안주하지 않고 대한민국 힙합 음악의 생태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도전한다. 그간 후배들의 작업물에 프로듀싱이나 피처링으로 참여하며 든든한 멘토가 되어 주었던 그는 이제 한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정규 작업물에 다양한 소스를 시도하는 동시에 스스럼없이 후배들을 초대한다. 힙합을 동경했던 평범한 한 소년, 더 콰이엇의 이야기다.


전작 정규 8집 'Millionaire Poetry' (2017)은 머니 스웨거로 대표되는 전작 정규 5집 'AMBITIQN' (2013)이나 정규 6집 '1 Life 2 Live' (2015)와는 다소 결이 다른 작품이었다. 프로듀싱 면에서는 한동안 주력했던 트랩 비트의 비중을 줄이고 붐뱁 비트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가사적인 면에서는 자기과시를 반복하는 듯하나 드문드문 기존의 물질적인 성취로만은 채울 수 없는 내면의 고뇌를 응시하는 제스처가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필자는 더 콰이엇의 심경의 변화에 주목하며 8집은 전작 정규 4집인 'Quiet Storm: A Night Record' (2010)와 마찬가지로 음악의 변곡점을 암시하는 과도기적 작품이 될 것이라는 예상을 했다.

'Millionaire Poetry' 앨범은 기존의 클래식함을 어느 정도 복원함으로써 앨범의 전반적인 균형감이 잘 잡힌, 필자의 입장에서 매우 즐겁게 들었던 좋은 작품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후 1년 4개월 만에 공개된 정규 9집 'glow forever' (2018)는 필자의 예견이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음을 방증하는 결과물로 등장했다. 일견 본작은 더 콰이엇이 정규작으로 내놓은 작품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이질적인 터치가 느껴지는 작품들이 제법 있으며, 더 콰이엇이 조력자로서 배경으로 물러나 있는 대신 전경을 생소한 신인 힙합 뮤지션들로 다수 채워져 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2번 트랙 'glofo ii'와 3번 트랙 '귀감'에서 특히 그러한 특징이 두드러지는데, 곡의 주도권을 ZENE THE ZILLA에게 내어주고 본인은 벌스 1개나 코다 정도만을 맡음으로써 프로듀서의 역할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처음에는 기존의 더 콰이엇 음악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통통 튀는 랩핑과 그에 맞춰진 밝은 신디사이징 프로덕션 덕택에 더 콰이엇의 곡이라고 부르는 게 어색할 정도이지만, 이내 자신은 그저 최적화된 공간을 창조하여 가능성 있는 후배들을 초대하고 챙겨주려는 평소 그의 성격을 정규작에서까지 확장하려는 시도임을 느낄 수 있었다. 상기한 트랙 외에도 전반 트랙에 걸쳐 후배 아티스트들을 두둑이 기용한 내역을 감상을 통해 직접 확인해 보시길 바란다.

인터넷 스트리머들을 위한 glow forever connected version 앨범 재킷. 후배사랑하면 역시 더 콰이엇 아니겠는가.


앨범을 관통하는 정서는 대체적으로 예상 가능한 범주-스웨거, 사랑, 자기성찰-안착해 있다. 다만 프로듀싱의 영향으로 보다 감정이 밝게 묘사되어 우울함이 전작보다 절제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전반부는 근래 계속해 오던 스웨거의 연장전이지만, 후배들이 자신의 스웨거를 대신 읊게 하고 상당수의 곡 플레이타임을 믹스테이프 수준으로 줄임으로써 그간 평론에서 지적받아 온 피로감을 어느 정도 상쇄한다. 후반부 역시 스웨거를 기본으로 깔고는 있으나 사색이 보다 전면적으로 치고 나오며, '여름 밤' 트랙에 이르러서는 훨씬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소울컴퍼니 시절의 담백한 감성을 소환하는 흔치 않은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더 콰이엇 최초로 어쿠스틱 기타 반주를 비트로 채용한 'way back home' 트랙의 소강을 거쳐 앨범의 마지막 트랙 'limelight'에 다다르면, 다시 현실로 돌아와 슈퍼스타로서의 삶을 자각하는 현재 진행형의 더 콰이엇을 마주하는 것으로 앨범이 마무리된다. 가사적 측면에서 어떠한 자기연민이나 타인의 오독을 거부하고 자신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되, 프로듀싱 면에서는 길가에 고인 물웅덩이처럼 흐릿한 잔상을 유도하여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포개는 듯한 설정은 본 앨범이 의식의 흐름을 묘사했음을 드러내는 동시에 앨범을 극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한 적절한 선택으로 보인다.


현재 리스너들로부터 타이틀 곡보다 많은 호응을 얻고 있는 곡은 '한강 gang'이다. Balming Tiger의 래퍼 Byung Un가 랩이 아닌 작곡 및 보컬로서 참여하였으며 '마에스트로'와 '아름다워'로 이미 유명한 Ambition Musik의 CHANGMO가 참여한 본 곡은 미니멀한 비트에 고즈넉한 한강의 풍경을 아름답게 담아낸 이지리스닝 계열의 곡이다. 프로듀싱 면에서도 새로운 시도이지만 필자는 더 콰이엇이 스웨거와 (차라리 더 콰이엇 입장에서는 '서민 코스프레'라고 칭하는 게 옳을 듯한) 생활밀착형 단어들을 위화감 없이 절묘하게 배합하였다는 점을 높게 사고 싶다.


미세먼지 없는 날은 아까워 왠지

chillin' with my homie 병언 한강 gang shit


wing doors go up at the riverside

사람들이 핸드폰을 들고 찍어 날


ay 광명에서 온 여의도민 rock star

ay 연예인이라기보다도 악사

ay 간장게장 is better than lobsters

난 이 세상에 나의 노래들로 낙서해


basquiat marriott

내 걱정 마 이건 내 인생이야 yea

look at my watch yea  look at my rollie yea

성공했다면 네게 다가오는 놈을 멀리해


if & co ice rings yea 편의점 ice creams yea

섞어 입어 didas nike 아님 bape n supreme yea


한강 gangs don't care about those thangs

we just out here puttin' in that work


스웨거 도중에 '간장게장'이나 '편의점 ice creams'가 불쑥 등장하는 모습은 더 콰이엇이 금수저 출신이 아님을 상기하는 동시에 본질적으로 여전히 우리와 같은 문화를 유대한다는 친근감을 심어준다(창모의 '막걸리'와 '벤치프레스' 역시 본 곡의 서사를 돕는 훌륭한 덤이다). 스웨거로 곡 전체를 떡칠하지 않고도 충분히 고유한 멋을 낼 수 있는 동시에 리스너의 호응도 이끌어 낼 수 있는 훌륭한 전략이 아닐 수 없다.


9집 발표에 앞서 여의도 공원에서 CD 보물찾기 이벤트를 한 더 콰이엇. 실로 '한강 gang'의 취지에 어울리는 이벤트였다.


그렇다면 본작은 과연 더 콰이엇 디스코그라피에 있어 어떠한 지위를 차지할 수 있을까? 필자는 아직 확정적인 판단은 유보하고 싶다. 본작은 그만큼 더 콰이엇 디스코그라피의 흐름에 있어 'AMBITIQN' 앨범만큼에 버금가는 변화가 있었고, 따라서 정규 10집이 발매되는 즈음에 본작의 가치를 보다 정확히 가늠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다만 지금 시점에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더 콰이엇이 스웨거를 바탕으로 한 정서를 크게 훼하지 않으면서도 프로듀싱 측면에서 동어반복을 피해감으로써 훌륭한 생명연장을 이루었다는 점을 첫 번째로 꼽고 싶다. 두 번째로는 본 리뷰의 주제의식이기도 한데, 더 콰이엇이 국내 힙합신을 위해 얼마나 고뇌하고 헌신하고 있는지 모범적으로 드러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 현실과 rap game and music business

여기에 과연 내일이 있을지 하나같이 질문을 던져

다들 도전을 두려워해 그럼 내가 먼저


uh 이 곳은 우리가 보는 것보다 더

밝을 수도, 혹은 어두울 수도 있어


어쨌든 절대 맘 편하게 있을 순 없으니

내가 불을 밝혀야겠지


- 정규 4집 수록곡 'Shine 'Em' (2010) 가사 中


더 콰이엇은 오래전 소울컴퍼니를 나오기로 결심할 때부터 힙합신을 자기가 책임지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사명이 있었다. 더 콰이엇은 그 때문에 기존 일부 팬들의 반발에도 무릅쓰고 일리어네어 레코즈를 설립하고 해외 힙합 음악을 적극적으로 국내에 수혈하는 데 매진했다. 콰이엇은 회사의 몸집을 불리는 한편 동료 및 후배들의 음악 작업에 적극적인 지원사격을 펼쳐왔으며, 미디어 측면에서는 쇼미더머니에 프로듀서로 출연함으로써 한국 힙합의 발전을 위한 멘토의 역할에 충실했다. 2016년에는 일리어네어 레코즈 산하에 'Ambition Musik'을 두어 비즈니스 측면에서 어떻게 후진양성을 해야 하는지 좋은 선례를 보여줬고, 2018년 현재는 본인의 정규 앨범에 많은 지분을 촉망받는 신예들에게 할애하면서도 음악적 퀄리티를 타협하지 않았다. 2011년 일리어네어 레코즈가 창립될 때 필자는 부랴부랴 더 콰이엇의 음악세계를 정리하는 리뷰를 쓰면서 더 콰이엇을 '대한민국 힙합의 빛나는 별'이라고 묘사하였는데, 이제는 그 별이 어엿한 한국 힙합신이라는 행성계를 이룩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본작의 합류로 인해 이제 더 콰이엇의 음악세계는 크게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을 듯하다. 10~20대의 감성을 대변하던 소울컴퍼니 시절(1기), 밤의 화법을 꺼내어 어른의 무드에 집중하기 시작한 정규 4집과 일리어네어 레코즈 설립 직후 무렵의 복잡한 심경을 담은 EP 'Stormy Friday'(1.5기), 해외 트렌드를 적극 수혈한 스웨거 중심의 음악과 쇼미더머니 프로듀서로서 대중적 인지도를 획득한 일리어네어 CEO 시절(2기), 후진 양성을 위한 산하 레이블 Ambition Musik의 설립과 물질적 가치와 내면적 가치의 대립을 부각하며 음악의 변곡점을 암시한 8집(2.5기), 그리고 기존의 멋을 유지하되 새로운 음악적 도전과 후진 양성을 일원화하기 시작한 멘토 더 콰이엇(3기)까지. 오로지 힙합이 좋아 힙합만을 파고들었던 광명시 출신의 한 소년은 이제 대한민국 힙합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잠잠히 빛나던 별이 주변의 행성을 끌어들여 어엿한 행성계를 이루어 낸 지금, 앞으로도 영원히 빛을 발하며(glow forever) 자신만의 큰 그림을 계속 그려나가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Ps. CD 발매 연기로 인해 본 리뷰 작성 시점에서 보너스 트랙을 들어보지 못하고 부득이하게 글을 작성한 점,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glow forever, The Qui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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